야구에 관한 일본소설이 두권이 있다 . '야구감독'은 진짜 야구얘기이고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는 야구얘기를 하고 있지만 야구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특히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 의 최고 책 '벌거벗은 점심(Naked Lunch)' 보다 더 난해하다.

솔직히 네이키드 런치가 더 난해하지만 이 책은 도대체 시대와 공간을 완전히 무시한다.

야구라는 이름으로 문학의 해체를 꾀하고 있다.

예전의 한신야구의 전설적인 용병 랜디바스가 나오고 전혀 야구소설이 아닌 서부 총잡이 소설을 야구에 대한

소설이라 우긴다. 그리고 이상한 민담으로 야구의 탄생을 얘기한다 ( 그리스 신화를 얘기하는듯하기도 하다)

작가가 야구광인건 알겠는데 아무튼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내가 뭘 읽고 있는지 모를정도의 혼란을

겪게 된다. 하지만 계속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상한 의무감에 빠진다.

마지막 책을 덮고서 이 책이 말하는 바를 약간 알 것 같기도 하다.

" 아아 , 야구를 하고 싶다! 그는 꿈속을 향해서 큰 소리로 그렇게 외쳤던 거야 "

야구로 인해 비로서 내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라는 것을 ...

난 두산베어스 팬이지만 그 이전에 야구팬이다. 롯데를 좋아하건 엘지를 좋아하건 기본적으로 야구를 좋아한다

는 것이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이 일본작가가 말하라는것이 이런거 아닐까?

기호학적으로 야구가 가지는 단어에 대해서 작가는 야구를 일상으로 해석한건 아닐까?

포스트모더니즘 작가가 쓴 야구 이야기..야구팬이라면 한번 읽어보면서 내 인생에서 야구란 단어는

무엇인지 생각해볼만 하다. 작가의 생각과 어긋나더라도 말이다.



그에 비해서 '야구감독' 은 진짜 야구이야기다 .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한 가상의 팀을 만들고 나머지 팀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팀이라는 거다.

그리고 감독으로 나오는 히오로카 다쓰로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그는 실제 감독인데

이 책에서는 가상으로 처리했다 . 그러나 그의 과거와 실제로 70년대 야구시대에서 야쿠르트를 감독해서

센트럴리그 정상에 올려났다. 그러니깐 실제로 책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한 일이 일어난것이다.

낯선 일본야구지만 김일용,장훈,왕정치, 나가시마 등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자이언츠라는 거대강팀을 엔젤스라는 가상의 약체 팀이 꺽는 감동의 소설이다.

감독에 부임해서 기존선수들과 갈등을 겪고 선수들을 발굴하고 기가막힌 용병술로 팀을 제압하는

야구팬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차있다.

히오로카 다쓰로가 김성근감독과 오버랩되지만 김성근감독이나 히오로카나 야구에 상당히 열정적인

사람들이다. 야구밖에 모르는..우리들은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야구에 열광하는건 아닐까?

단순한 네러티브를 가지고 있지만 70년대 분위기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 마치 80년대 초중반

한국야구를 보는듯한 기분이랄까?

야구는 사실 가장 어릴때 본 야구가  재미있다.

이 책은 그런 향수를 자극한 훌륭한 소설이다.
Posted by 기억상실 :

한국의 마피아가 3군데 있다고 한다. 호남향후회 , 해병대전우회, 고려대 동창회

아마도 이건 어찌보면 친목이 돈둑해서 생긴 말일 것이다.

나름 실력행사와 인맥활용이 강한 측면이 있지만 그냥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한민족 특성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저 들이 유난히 저런 습성이 많은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저들은 아래 조직에 비하면 애교에 불과하다.

최소한 저들은 대한민국의 해악을 끼치거나 좌지우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 , 김앤장. 교회

저 세곳에 문제점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대한민국 전체가 손해를 감수하는 데에 있다.

그런 얘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책이 두권있는데

국민일보기자 김지방씨가 쓴 '정치교회' 와 임종인,장화식 공저의 '법률사무소 김앤장'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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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교회' 에서는 권력을 향하는 교회에 대해서 현상과 비판을 보여준다. 특히 이명박이라는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말이다.

정교분리가 되어있는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대놓고 교회에 대해서 애정을 표한 대통령은 이승만과 이명박이다.

특히 이승만의 기독교우대 전체는 지금까지 한국 상류사회를 기독교사회로 만들었다. 모든 고위관료들은
이승만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교회를 나가야만 했다. 상류층과 결탁한 목사들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으로 변하고
천주교주의자 김대중과 무교인 노무현때에 정치적으로 심한 갈등을 보여준다 . 다시 이명박이 되었다.

이명박정부의 친기독교적인 모습은 서울시장때 모습은 뒤로하고 소망교회인사편중에서 잘 보여준다.

그리고 촛불집회에 관한 기독교의 입장에서도 말이다.

이명박대통령이 촛불집회에 관한 문제해결을 위해서 종교계원로를 만나고 다닐때 유독 기독교원로들만
촛불집회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사실 기독교는 상당한 위기에 빠져있다. 점점 신도들은 줄어가고 목회자들은 늘어간다. 그래서 그런지 신도확보
에 연연하게 되고 대형교회 위주로 가게 된다. 교회가 대형화가 되어다보니 신도들의 입맛에 맡게 세속적이고
자극적이게 변해간다. 암튼 이책에서는 교회에 정치적지향을 비판하지만 국민일보의 사주이기도 한 조용기
목사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세히 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김앤장에 비하면 정치교회는 순진하다고 봐야 한다. 김앤장은 좀더 음울하고 계획적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대한민국보다는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위해 힘쓰는 회사이다.

뭐 법률집단이 법적인 근거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애쓴다는것도 이해가 안되는 측면은 아니다 .

문제는 대한민국 정책에 자신의 인맥을 끌어들어서 자신들의 집단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거다.

또한 정책결정자가 퇴임하면 그를 취업시켜서 또 다시 로비를 한다는거다.

론스타 외환은행, 진로 골드만삭스 . 삼성에버랜드  그 사건에는 언제나 김앤장이 개입되어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김앤장의 주장은 '권리위에 잠자는 자는 깨우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이다. 그러나 법과 권위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아주 평범한 진실을 꺠우쳐야 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이책이 말하는 바다.
 

촛불시위가 한창인 이 시점에도 대한민국의 카르텔들은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4.19 , 광주 민주화항쟁, 6.10 사실 모두 미완의 투쟁이였다. 이승만 퇴진 과 직선제 개헌이라는 결과를
얻고 대한민국은 계속 그들의 손에 놓여있다.

촛불집회도 마찬가지이다. 소고기수입과 대운하를 막는다고 한 들 대한민국의 지배세력은 계속 그래도 이고
우리는 다음 분노때 까지 당하고 살아야 하는거다.

Posted by 기억상실 :


또라이 제로 조직의 원제는 "The No Asshole Rule " 이다

내용은 또라이들이 얼마나 회사와 팀구성원들에게 해악을 끼치냐 라는 것인데

쫌 중복적이고 어찌보면 한국현실보다는 시스템이 잘되어 있고 개개인의 창의성을 강조하는 미국 비지니스

현실을 얘기한 책이라고 해야 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 몇가지 공감되는 내용이 있는데

아무리 또라이들이 능력이 뛰어난다 해도 그 들로 인해서 퇴사하는 회사인력이 회사에 끼치는 비용보다

덜하다는 거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능력있는 또라이들에게 손을 뻤는다.  어찌보면 MB도 능력있었던 또라이다.

그러나 그 로 인해 대한민국은 너무 많은 손해비용을 물고 있다.

이게 무슨짓인가 . 광화문에 모여서 이 더위에 말이다.

물론 앞으로 이명박이 할려는 일들이 성공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같은 꼴통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명박이 유능한 시절은 88년 이전에만 국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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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렇듯 한국사회는 능력있는 또라이에 대한 환상을 너무 가지고 있다.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자그만한 비리가 있어도 그 또라이가 다른 부분에서 능력을 펼치는 저런 흠정도는

상쇄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안타까운것은 능력도 없는 또라이들이 상층부에 자리 잡혀있을 때다. 정운천같은 키위판매상같은 이는 절대로

농림부장관을 해서는 안될 사람이다. 전혀 관료로서 능력없는 우유부단한 또라이인데 어떻게 그런 자리에

올랐는지.  아무튼

많은 회사들이 인재유출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그 이유가 개인의 욕심(연봉이라던가 일이라던가 ) 때문이

아니라 내부시스템 과 상층부들이 문제가 있는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짧지 않은 회사 생활에서 느낀건데 꼭 또라이로 칭하는 사람이 높은자리나 의사결정자라면 그 회사는

반듯이 끝이 안좋게 되거나 더이상 성장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과 현대는 운이 좋은편이다.




샌드위치 위기론의 허구에서는 좀 더 한국사회의 조직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88만원 세대란 책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우석훈 박사의 저서이다.

한국사회의 위기는 중국의 성장과 일본의 10년 불황을 이겨낸 재기가 아니라 바로 한국기업조직의 내부에

있다는 이야기다.

고용불안이라는 결과를 도출 시킨 내부경쟁구도가 피로도가 쌓여서 더이상 창의적이지 않은 한국기업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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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이고 한명에게 몰아주는 승자독식사회이고 또한 재벌들의 소유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기업의 생산성과 상관없은 내부충성에 정력을 낭비하고 성과주의에 매달린 나머지 숙련된 노동자보다는

관리자에게 촛점을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참 쉽지않다 . 이런 문제들은 한국신화의 원동력이였기 때문이다. 이미 재미를 본 기업들이 과연 자신들이

양보하면서 노동자에게 이익을 줄것인가 하는것이다. 또한 승자가 되어버린 관리자들이 자신의 파이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냐는 것인데  우린 그러라고 배우지 않았다.

이런 문제는 정부에서도 나타난다. 대기업우선주의 정책과 성과지표를 위해서 수출에만 신경쓴 나머지

내수에 촛점을 맞춘 중소기업들은 망하건 말건 신경안쓰는 정부.

교육에서도 이 문제는 잘 나타나 있다. 서울대와 같은 SKY 출신들에게 과도하게 관대한 사회풍조라던가

그 안에 들지 못하면 패배주의를 너무 쉽게 인정하는 국민들이라던지

이런 분위기는 모든이들을 피곤하게 한다. 한국사회는 너무나 피곤하다.

샌드위치 위기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분위기때문에 말이다.



두 책 모두 조직론에 관한 책이지만 한 책은 인격수양과 다른 사람과 협업을 할 줄 모르는 또라이같은 사람때문에

미치는 영향을 얘기하고 다른 한책은 좀 더 거시적으로 내부 시스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둘다 개개인 직장인들에게 스트레스를 가속화 시키는 것들이다. 그래서 자영업인구가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많은 한국사회가 어떻게 보면 대충 이해가 가긴한다.



Posted by 기억상실 :

퀴즈쇼 와 1999년 나의 모습

2008. 1. 13. 17:29 from Book


1998년 말부터 2000년 봄까지....

아직 세상은 IMF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많은 청년 백수들이 피씨통신이라는 공간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을 시절이였다.

아직 인터넷전용선이 등장하지 않을 시점이라서 모뎀으로 연결한 피씨통신의 마지막 전성기시절

김영하의 소설에 주인공처럼 나도 비록 대학교4학년이였지만 취업도 안되고 그리고 또한 노력도 없는 시절에

피씨통신 영화퀴즈방에 모여서 세월을 허비하고 있었다.

위대판피츠제랄도가 어떻고 린다피오렌티노의 영화를 봤냐 안봤냐에서 부터 녹색광선이 어떻고

톡식어벤저를 아냐 모르냐....많은 영화광들에 의해서 플롯은 무시당한채 난도질 당하고는 했다.

거기서 한 연상의 여인을 알게 되었는데 아마도 내가 마지막 사랑한 여자일 것이다.

날 어쩔줄 모르게 한 여인. 그 여인에 의해서 더욱더 난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갔고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한동안 그녀와의 실연에 가슴아파서 아무것도 못했다. 더이상 아픔이 추억으로 남을 때쯤 난 취업을 하였고

그 이후로는 사랑을 하지 못했다.



김영하의 소설 퀴즈쇼에서 주인공은 현재를 얘기하고 있지만 90년대 말 피씨통신의 마지막 전성기와 아주 흡사하

다. 그 때도 지금처럼 청년실업이 한창일 때고 아직 벤처붐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저 유일한 그들의 소통공간은 피씨통신 영퀴방이였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이민수는 어쩌면 가장 최악인 젊은이다. 청년백수들이 그러하듯이 어느 한곳에 방패가 되어줄

부모와 같은 후원자도 없고 걔다가 금전적인 낭패에 빠져있다. 지금 88만원세대로 대표되는 젊은이들 중에서

가장 최악인데 게다가 고급지식을 가진 룸펜이라는거.. 이런이들은 육체노동을 통해서 현실을 벗어날 수도 없다.

높은 지식을 가진 젊은이를 받아줄 사회가 없다는것이 지금 현실의 가장 큰 문제이다.

이민수도 유일한 소통공간을 인터넷의 퀴즈방에서 풀었고 거기서 한 여자를 통해서 세상을 나올려고 했으며

그가 의도하지 않게 소속된 공간에 갇혀서 지금 현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규칙적인 생산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여전히 불안하지만 다른 사람들 처럼 살기 보다는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자아찾기같은 로드무비같은 구성은  이 소설에서 보여준다.
 
사회에서 성공한 자나 낙오한 자나 관심없는 자나 모두 한 사회의 구성원인데

이 사회는 주류들에가만 친절하고 관대하다.

그런 사회를 만든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퀴즈쇼에서 수없이 나오는 퀴즈들과 살아가면서 수많은 질문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퀴즈쇼처럼 정답을 빨리 말해야만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오답을 3번말하면 탈락이 될까?

하지만 사회는 패자부활전이 없다.

낙오되면 낙오된 다른 퀴즈쇼에서 강자를 가를 뿐이다.
 
Posted by 기억상실 :
 

시간을 파는 남자....분류체계로는 소설이지만 소설같지 않은 소설이다..

쫌 황당한 내용이지만 ( 어느 회계사가 5분의 시간이 들어있는 깡통을 판다는 내용이다)

많은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비록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을 떠나서 내가 33년 약간 모자르게 살아오면서

허비한 것들에 대해서 되짚어 보게 된다.

우리는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한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그런 시간을 젊을때는

낭비하면서 (빠삐용의 그 유명한 장면도 떠오른다 )

그리고 어느덧 철이 들고 가정이라는것을 꾸미면서는 내가 빚진것에 대해서 (대출금,학자금

등등..) 시간을 허비한다.

참 아이러니 하게 시간은 분명히 나의 시간인데 그 시간에 대한 소비는 오로지 체제유지에

대해서 소비되어지고 있다. 주인이 소유물에 대해서 소유권을 행사하지 못하다니..

결론은 단순하다.

돈을 갚기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는것이 아니라 시간을 팔아서 돈을 번다라는 것이다.

그 돈으로 집도 사고 ..차도 사고..달라진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최소한 압박감에서는 벗어난다.

아직 빚진적도 없고 은행의 잔고도 살아가는데 지장없을 정도로 충분하다.

급여도 불만족스럽지만 혼자 쓰는데 넘친다.

그런데..나에게 가족이 생긴다면? 좋아하는 DVD,책,CD 를 마음놓고 살 수 있을까?

속물이 되는건 간단하다.

그저 내가 가진것에 비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것..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싶어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남들보다 덜 시간을 소비하는데

만족해야 되지 않을까?

Posted by 기억상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