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1 . 잠실 개막전

2. 우리 히어로즈의 창단 첫 공식 경기

3. 레스의 4년만의 복귀무대 (2004년이후 첫 등판)

4. 정원석.유재웅 라인업 ( 홍성흔 , 안경현 개막엔트리 제외)

5. 레스 - 장원삼 좌완의 대결

6. 민병헌 2번 기용

REVIEW

1. 레스 바뀐 스트라이크존 고전 - 위기관리 돋보임

2. 장원삼 초반 고전 이후 안정

3. 이대수 팀 첫 홈런

4. 우리히어로즈의 어린이들 타격 활발 고무적

5. 정재훈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깔끔한 마무리

6. 유재웅 - 정원석 SO SO 당분간 주전 기용 될듯

7 . 타자들 아직 제 컨디션이 아닌듯 날씨탓?


총평 : 쌀쌀한 날씨라서 그런지 투수 타자들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였다. 하지만 강팀이 된것인지 아니면 운인지 한번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몇번의 위기속에서도 주도권을 뺏기지 않았다. 레스의 성공여부는 미지수 , 그리고 이종욱과 김현수가 제 컨디션을 찾으면 좀 더 나은 활약을 보여줄것이라고 봄 , 이번 원정 6연전이 관건 약간 분위기가 침체인 기아와 SK 상대로 어떤 경기를 펼치느냐에 따라서 4월 레이스를 가늠해봄 직함

BEST : 이대수 
WORST : 이종욱 , 김현수

승리투수 : 레스
홀드 : 임태훈
세이브 : 정재훈






Posted by 기억상실 :

2008 년 프로야구 시작이 3일남았다.

현대가 매각되어서 우리히어로즈라는 야구사상 가장 타이티한 구단이 생겼고

저기 남쪽 지방에서는 최초로 외국인감독이 들어왔다.

그리고 불과 재작년만해도 ESPN 아침 에서 보던 선수들이 MBC-ESPN 에서 볼 수 있다.

그것도 저녁에 말이다.

하지만 특히 두산베어스에게는 구단이나 선수,코칭스탭프나 팬들에게 의미있는 한해일듯하다.

이전 5년간 두산은 꼴지후보였는데 올해는 SK와 2강에 꼽히고 있다.

그만큼 우즈가 떠나 2003년이후 가장 최강전력이라는 것이다.

또 김경문감독의 마지막 부임년도이다. 내년에 재계약이 예상되지만 올해도 역시 좋은 성적을 거둘경우

성적에 목말라있는 팀에서 러브콜이 끊이지 않을 듯하다.

김동주는 올해후 다시 해외진출을 노리고 있다. 베어스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동주를 내년에 라쿠텐의

그 끔찍한 유니폼입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홍성흔,이혜천은 이번 시즌 끝나고 FA가 된다.

장원진,안경현은 내년에는 코치수업을 받을지 모른다.

김인식전감독이 이룩한 위대한 밀레니엄세대 와 김경문의 아이들이 공존하는 마지막 해인것이다.

그러나 팬의 기대와 달리 여러가지 잡음이 들린다.

홍성흔의 트레이드 요청 , 안경현의 주전 배제 , 구자운의 웨이버고시 등 팀캐미면에서 최고라고 불리었던

팀이 안에서는 그렇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이 문제일까? 감독과 고참들과의 파워게임? 선수들간의 파벌? 진짜 기량적 문제일까?

암튼 올해는 이용찬이라는 대형신인이 부상을 이기고 나올 수 있으며 진야곱이라는 이혜천이후 괜찮은

좌완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재영,이재우 듀오도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으면

계속 성장중인 고영민,민병헌,김현수,채상병 모두 내년 성적을 앞설것이라고 예상하고 있고

이혜천,김선우도 작년에 없었던 전력이다.

비록 작년 최고 투수 리오스가 없지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욱더 풍성해졌다고 볼 수 있다.

검증된 전력은 아니라고 해도 그 사정은 다른 팀도 마찬가지이다.

우승은 아니라고 해도 4강전력은 충분하지 않을까?

그리고 오늘 계약한 홍성흔은 조만간 주전으로 기용될 듯하다. 그냥 2군에 썩히기에는 그의 방망이가 아깝다.

포수에 자리에서 화이팅을 외치는 모습을 못보는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예상 라이업을 보자면

1번 민병헌(RF)
2번 이종욱(CF)
3번 고영민 (2B)
4번 김동주(3B)
5번 최준석 or 유재웅,홍성흔 (DH)
6번 김현수  (LF)
7번 홍성흔,정원석,안경현 (1B)
8번 채상병 (C)
9번 이대수 (SS)
백업 : 김용의, 오재원, 김진수, 김재환, 최주환 , 전상렬

투수진은
선발 : 김선우,레스,랜들,이승학,김명제(이혜천,진야곱)
중간: 이재우,이재영,임태훈,고창성,이용찬,김상현
마무리:정재훈

정재훈의 마무리능력이 작년과 같다면 이재우,이재영,임태훈중에서 누군가 한자리를 꾀찰듯하다.

그리고 홍성흔과 일부 투수들중에서 트레이드가 되어서 두산의 약점을 메꾸어줄 가능성도 항상 열려있다.

야구를 20년 넘게 좋아하다보니 몇가지 요령이 생겼다. 프랜차이즈스타가 그 팀에서 은퇴하는 것을 보는것은

팬으로 커다란 영광이지만 그래도 어쩔수 없는 거 아닌가.

야구의 매력은 언제든지 새로운 스타가 나온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는 두산은 충분히 팬들에게 매력적인

팀이다. 올해는 어떤 깜짝스타가 나올까?

그다지 행복한 삶은 아니지만 야구가 있기에 비시즌기간보다는 천배는 행복하다.

모든 야구팬들이 그렇듯이                                                
Posted by 기억상실 :

예전에 후추라는 스포츠 사이트가 있었다. 엄청난 필력과 전문적지식을 가진 필진들이 참가한 곳인데 아쉽게도 이제는 그 그들을 볼 수가 없다. 박노준의 후추인터뷰를 어느 블로그에서 구했다.
참 소중한 글이다.

81년부터 내가 변하지 않는것은 베어스팬이라는거다. 코흘리기 초등학생 시절이나 나태해 져가는 34살의 노총각때나 말이다. 박철순의 베어스에 반했고 박노준의 입단을 누구보다도 좋아했으며 박노준의 트레이드로 인해 한동안 야구대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해태,쌍방울의 박노준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해태시절 플레이오프때 결승홈런을 떄린적이 있었지)

베어스시절 1번 타자 박노준..난 아직도 그를 그리워 한다. 그가 보여준 성적은 그저 보통선수보다는 쫌 잘하는 정도였지만 고교 최고 스타가 베어스에서 뛴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80년대 초반 박노준의 인기는 동방신기 정도였다 )

그의 베어스 코칭스탭으로 뛰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오비베어스 유니폼을 공구했는데 백넘버는 당연히 박노준의 18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베어스 시절 박노준 사진 정말 구하기 힘들다 ㅠ.ㅠ

PROLOGUE

지난 20년 넘게 한국 스포츠를 주목해온 팬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선수들의 이름에 관한 생각 말이다.  극히 개인적인 '망상'에 불과하지만, 참 운동 잘 할 것 같이 들리는 이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두 부류로 다시 나뉘어 진다.  '표준형' 그리고 '희귀형 '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강철', '이정훈', '김한수', '김윤환', '김재한', '김용철', '신진식', '신현호'…와 같이 '수', '철', '식', '훈', '호' 자로 끝나는 이름들 중에 수준급 운동 선수가 많이 있는 듯 싶다.  아니, 영락 없는 '표준형 운동선수 이름'인 선수들이 있었다.  반면, '홍명보', '장효조', '황영조', '김동광', '강두태'…와 같이, 어찌 보면 전혀 운동 선수 이름같이 들리진 않지만, 기가 막히게 그 분야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 있기도 하다.  순수히 필자의 '억지' 또는 '편견'쯤으로 받아 들여도 상관 없는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선수들의 이름을 관찰하다 보니, 이젠 신인 유망주의 이름을 들어도 '아, 얘는 될 이름 같다, 아니다..' 정도의 통밥이 나오기도 한다.  

박노준… 그의 이름만큼 특이하지만 결과적으로 막연하게나마 야구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 또 있을까?  혹자는 그 이름 석자를 들을 때면 '불운의 사나이', '만능 선수', '여우'..등 여러 가지 단어들이 연상 된다지만, 필자에겐 '박노준' 이란 곧 '고교 야구'를 의미했다.  우리나라 땅에 프로 야구가 태어 나기 전,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고등학교 야구… 박노준은 곧 고등학교 야구의 '축도' 이자 '마지막 황제' 였다.  '입추에 여지가 없는' 서울 운동장, 마분지로 만들어 진 줄무늬 햇빛 가리개 모자,  푸른색 하복의 '런닝 셔츠 응원단', 앙교 선수들의 경기 전 인사, 경기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 '1인 3역' 포지션 이동, 우승 팀의 헹가래, 그리고 패배자의 눈물… 이젠 '아득한 기억의 저편'이 되어 버린 우리 고교 야구를 상징하던 풍경들이다.  

'후추' 창간 이후,  야구 분야의 선수를 명예의 전당에 헌액 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많은 야구 팬들에게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후추는 창간 이전부터 꼭 한가지만은 고집하고 싶었다.  야구계의 제1호 헌액자만큼은 우리나라 야구의 '허리'와도 같았던 '70년대 고교 야구 출신'에서 한명을 선정한다는 계획이었다.  지금의 '이승엽', '정민태', '구대성'…등의 스타 플레이어들을 있게 해 준 그 우리 야구의 '뿌리'였던 고교 야구에서 말이다.  참으로 많은 이름과 얼굴들이 떠 올랐다.  70년대 한국 고교 야구 최고의 스타를 비롯해서 감독, 심판, 원로, 열성 학부형 까지… 하지만, 우리 야구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한과 북한처럼 '프로와 아마츄어'로 두 동강이 나 버린 우리 야구의 '현주소'를 생각하자니, 과거에 비해 정말 보잘 것 없어져 버린 고교 야구의 마지막 자존심 역할을 해 준, 그리고 옛 명성에 비해서는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그나마 프로와 아마츄어 야구의 끊어진 고리를 이어 주었던 '만능 선수' 박노준을 져버릴 수가 없었다.  

후추 '명예의 전당 - 박노준 편'에서는 가급적 박노준의 고교 시절 활약상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12년이란 긴 세월동안 그는 프로 유니폼을 입고 뛰었지만, 아무리 호의적인 시각으로 그를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프로 성적은 그의 고등학교 시절의 그것에 비교가 되질 않기 때문이다.  누구 말대로 '턱도 없는 소리' 였다.  프로에 와서 그가 완전히 '죽을 쒔다.' 라고 하기 보다는, 박노준의 고교 시절 야구는 아름다웠다.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그의 고교 시절 트레이드 마크였던 '눌러 쓴 모자' 챙 사이로 삐져 나오던 매서운 눈빛,  짧지만 '우아했던' 보폭으로 내야를 뒤 흔들던 주루 플레이,  정교하고 날카로웠던 왼손 스윙, 실점 위기 때 마다 우측 외야에서 투수로 자리를 옮겨 자신감에 넘쳐 뛰어 나오던 그의 특급 릴리프 피칭…  박노준의 '아름다운 야구' 때문에 당시 꼬마 팬들은 한번쯤 스위치 히터 변신을 시도 했었고, 선동열 보다도 먼저 '18번' 이란 등번호에 힘을 실어 주었고, '선린 야구' 아니 '고교 야구'의 진미를 맛 볼 수 있었다.  상대 클린업 트리오를 연속 삼진으로 처리하건, 괴물 투수의 볼을 라이트 펜스 뒤로 넘겨 보내건… 그는 늘 한 표정, 한 동작이었다.  유난히 챙이 길어 보이던 그의 선린 상고 야구 모자를 꾸욱~ 눌러 쓰고, 반 정도밖에 보여 주지 않던 그의 검게 탄 포커 페이스,  그리고 오똑한 그의 콧날… 그야 말로 만화에서만 볼 수 있었던 Cool 한 '고딩' 야구 선수였다, 박노준은…

그렇게 '펄펄 날던' 아마츄어 시절엔 그 어떤 명예의 전당에도 초대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았고, 명예로운 은퇴식을 고집 하기엔 너무 흡족치 못했던 프로 성적…  이런 경우엔 누가 어디서 박노준을 대접해 준단 말인가…?  정확히 18년 전, 그가 수 많은 팬들에게 제공 해 주었던 그 '잊지 못할 야구 순간들'에 대해선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가…?  후추만은 꼭 하고 싶었다.  아직도 박노준의 이름 석자를 들으면 가슴이 뛰는 그런 팬들에겐 잊혀진 옛 기억을 되살려 주고, 박노준의 '전설'을 미처 모르고 자라 온 젊은 팬들에겐 쓸쓸히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던 '쌍방울의 박노준'의 모습이 아닌,  대한민국 고교 야구의 '마지막 황제' 박노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 주고 싶었다.  연봉 협상이니 해외 진출이 전부가 아니던 시절, '룸살롱 파티'가 아닌 '불고기 파티' 한번에 사력을 다 해서 뛰던 시절, 모교의 명예를 위해서 라면, '심장'을 내 쏟았던 고교 야구의 황금기를 회상하며 그 '아름다운 시절의 아름다운 야구인' 박노준을 불러 본다...


후추 REPLAY:  제 11회 봉황대기 고교 야구 대회 (1981년)

1981년 여름.  MBC 청룡도, 대우 로얄즈도 존재 하지 않던 시절… 대한민국 스포츠 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제11회 봉황기는 어느 학교의 품으로..?'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청룡기 또는 황금사자기 (각각 올해로 54회, 53회 째) 만큼 전통이나 역사는 짧지만, 지역 예선 없이 전국 고등학교 야구 팀 전체가 서울에 모여서 박 터지게 싸운다는 측면에서 볼 때, 봉황대기는 '한국의 고시엔' 이라 불릴 만큼 고교 야구의 '왕좌'를 판가름 내는 무대라고 볼 수 있었다.  

이미 대통령기는 이건열-백인호-조계현이 이끄는 군산상고로, 청룡기는 성준--류중일의 경북고의 품으로 넘겨 줬지만, 역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무관의 황제' 선린상고는 봉황기만큼은 넘겨 줄 수 없다는 심정으로 독을 뿜으며 '삼복 더위 8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회 초반부터, 오명록의 경남고, 김정수의 진흥고, 한희민의 세광고를 각각 8-0, 4-2, 3-0으로 물리치는 막강 화력과 특급 피칭의 조화를 바탕으로, 선린상고는 일찌감치 4강 자리에서 적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세광고와의 8강전에선 '이 바오로' 라는 잊지 못할 이름의 투수의 역투로 김건우-박노준 계투 진의 숨통을 트이게 해 주기도 했다.  한편,  특급 포수 서효인을 축으로 서울 팀의 자존심을 세우며  8강까지 올라 왔던 신일고는 청룡기 대회 우승팀 경북고 성준의 산발 3안타 완봉에 역시 3-0으로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김영덕 감독이 이끌던 천안 북일고와 좌완 이현택의 부산상고가 나머지 2장의 '4강 티켓'을 차지 하였다

.

'선린 대 북일'…'경북 대 부산상고'가 격돌한 4강전은 많은 전문가의 예상과는 달리, 각각 5-0, 6-0이라는 선린과 경북의 일방적인 완봉승으로 끝났다.  고교 야구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던 선린의 선발 투수 김건우는 이 대회 4강까지의 등판 횟수 20이닝에 17 삼진, 3자책점, 방어율 1.35를 기록했고, 칼날 슬라이더와 슈트를 주 무기로 삼던 선린의 릴리프 전문 박노준은 16이닝에 14 삼진, 1 자책점, 방어율 0.56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자랑하며 선린의 결승 진출을 견인했다.  경북고의 좌완 투수 성준 역시,  20이닝 출전에 4삼진, 무실점 이라는 전형적인 '초고교급 투수의 괴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렇게 확실한 '방패'를 주무기로 삼던 양팀의 결승전을 놓고,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은 선린상고의 우세를 점 쳤다.  물론, 이미 한번 청룡기에서 선린상고를 잡은 경험이 있는 경북고의 전력이었지만,  선린상고가 두번 패 하진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선린상고에는 '공-수의 핵' 박노준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빼어난 강-약 조절과 두뇌 피칭으로 경기 중반 이후에 '무실점 계투'를 책임져 왔던 박노준은 팀의 붙박이 3번 타자로서도 4강전 까지 5할2푼 이라는 경이적인 타율을 보여주며 '고교야구의 정점'으로 일컬어 지던 선수였다.

1981년 8월 25일 아침… 대망의 봉황대기 결승전을 앞 두고 특석 2.500원, 일반 1,000원, 그리고 학생표 500원을 받던 서울 운동장엔 뒤늦은 여름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고교 야구 최고의 자리를 놓고 야구 명문 두 팀간의 '최고 승부'를 손꼽아 기다리던 당시 야구 팬들에겐 그야말로 충격적인 '안티 클라이막스(anti-climax)'가 발생한 것이었다.  하루 왠 종일 내리던 비로 인해 결승전은 다음날 26일로 연기 되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20일 넘게 투혼을 발휘했던 양 팀 선수들은 피로한 몸을 달랠 수 있는 달콤한 휴식을 맛볼 수 있었다.  선린상고 선수들은 모처럼 귀가해서 가족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냈고, 지방에서 올라 온 경북고 선수들은 숙소인 '왕도여관'에서 '정신무장'을 다지고 있었다.

다음날 (8월26일) 벌어진 경북고와의 결승전… 후추 명예의 전당 헌액자 박노준의 호칭은 어쩌면 이 경기를 통해서 영영 바뀌게 된건 지도 모른다.  '고교 야구의 영웅'에서 '비운의 스타'로 말이다.  1회초 경북 공격, 무사 2, 3루의 결정적 위기를 삼진, 내야 범타로 처리한 선린의 선발 김건우의 호투를 계기로 선린은 1회말 반격에 나섰다.  1회말 박노준의 안타를 중심으로 1사 만루의 기회에서 후속 타자 조영일 (5번), 이경재 (6번)의 적시타로 먼저 3점을 선취하는 과정에서 박노준의 화려한 고교 야구 인생은  한 순간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정말  눈 깜짝 할 순간에 말이다.  2루에 있던 주자 박노준은 이경재의 좌전 적시타에 '무리'인줄 알면서도 힘차게 홈으로 대시 하였다.  선린의 탄탄한 투수력을 고려할 때, 초반 2득점과 3득점의 차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한 마음에 홈플레이트 앞에서 '훅 슬라이딩'을 했는데 발이 맞지 않아 왼발이 완전하게 꼬였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그라운드의 흙 사정은 매끄러운 슬라이딩을 하기에 그리 이상적이지 못 했던 이유도 분명 있었다.  당시 박노준의 발목이 완전히 돌아 간 상태를 확연하게 포착해서 재방송, 또 재방송 해 주던 방송사가 매정하다고 생각 될 정도로, 그의 부상은 섬뜩한 광경이었다.  발목이 뒤 틀린 뒤에도 박노준은 엉금 엉금 기어서 홈플레이트에 도착, 선린의 석점 째를 챙겨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그의 고교 야구 신화도 그 순간 그렇게 쓰려졌다.

피칭, 타격, 그리고 주루 플레이… 어느 한 분야도 팀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독보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박노준의 1회 퇴장은 '전력 차이' 그 이상의 '심리적 파멸'을 선린에 초래했고, '한국병원'으로 후송 된 박노준은 '그래도 3점 차'라는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담담한 마음으로 병실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봉황 히어로' 성준을 상대로 6회까지 4-2란 점수로 리드를 지켜 나가던 선린상고는, 7회에 등판한 경북의 복병 잠수함 문병권 투수의 구위에 철저히 봉쇄 당했고, 8회초엔 결국 연속 된 실책으로 대량 실점을 하게 된다.  선린 2루수 김명배의 실책의 뒤를 이은 유격수 실책,  그리고 1루 악송구, 포수 조홍기의 3루 악송구로  2실점 해서 4-4 동점을 만들어 주었고, 이어 진 경북 타선의 연속 3안타와 희생 플라이로 2점을 추가, 승부를 6-4로 뒤집어 놓고 대망의 초록 봉황기는 대구로 향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3년을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숨 가쁘게 장식했던 박노준의 마지막 경기는 그렇게 비참하게 끝이 났다.  구수갑 감독이 이끄는 경북고에만 두번씩 무릎을 꿇으며 말이다.  그리고 그에게 남겨진 '영광의 상처'는 왼발목 복사뼈 2개 골절과 3각 인대 파열이라는 무시 무시한 8주 진단과 함께… 박노준은 울었다.  수많은 야구 팬들도 울었다.  81년 전국대회 준우승만 세번을 하게 된 선린상고의 선수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조각난 박노준의 왼발을 쳐다보며 말이다.  

결승전을 제대로 뛰지도 못했던 박노준이 대회 '감투상'을 받은 사실보다도 더  박노준의 진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80년대 들어 와 처음으로 6년 만에  봉황기를 안게 된 전통의 명문 경북고 선수들이 우승이 결정 된 다음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경북고 동문회 사무실도, 야구협회 사무실도 아닌… 한국병원 209호실이었다.  그리곤 박노준에게 위로의 악수와 격려의 대화를 남기고 떠났다.  그들은 더 이상 박노준을 '적수'가 아닌 한국 야구의 내일을 같이 끌고 나갈 '최고의 동반자'로 인정 해 준 장면이었다.  바로 고교야구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선린 야구'

박노준은 어렸을 때 유난히 체력이 약했다.  초등학교 1학년을 두번이나 다닐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체력 보강'을 위해서 시작한 운동이 야구였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초등학교부터 서울의 용강 초등학교를 다녔다.  4학년 2학기 말부터 아버님의 권유로 용강 야구팀을 '따라 다니며 운동이나 좀 할 계획'이던 박노준은 그 후로 24년이나 글러브와 방망이를 쥐고 살게 되었다.  당시 포지션은 1루수와 투수를 맡고 있었다.  물론 왼손으로 치고 던지며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투수 쪽에 훨씬 더 소질을 보인 박노준은 선린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팀의 붙박이 좌완 투수로 활약을 한다.

그렇게 시작한 야구 덕분에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리틀 야구 극동지역 예선차 '괌'이라는 외국에 난생 처음 나가게 된다.  리틀 야구란 '학년 기준'으로 선수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 기준'으로 선수들을 뽑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록 중학교 1학년 생 박노준이었지만, 그는 난생 처음으로 'Korea'란 마크를 달고 해외 무대에 서 보게 된다.  이 때, 박노준의 눈 부신 활약으로 당시 '리틀 야구의 거목' 이던 대만을 2-0 완봉승으로 물리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그리고 박노준이 진학한 곳이 선린 상업 고등학교…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선린상고 야구의 명성은 그 어느 야구 명문의 그것에도 밀리지 않았다.  영원한 경북고의 맹장이었던 고 서영무 감독이 잠시 이끌던 서울고등학교에게 비록 78년 봉황대기 결승에서 무릎을 꿇게 되지만,  그때부터 김문영, 이선웅, 윤석환, 류지홍..등의 쟁쟁한 고등학교 야구 선수들과 박용진 감독의 조련술은 그 어느 팀과 맞붙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게끔 선린 야구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박노준-김건우와 같은 '선린 Farm System' 출신 1학년 선수들의 입학은 더욱 더 선린 야구의 미래를  밝게 해 주었다.

박노준이 고등학교에 입학 하자 마자, 그러니까 1979년 봄에 있었던 '사건'이야 말로 박노준이란 이름 석자를 국민들의 머리 속 깊숙이 입력시켜 주기에 충분했던 일이었다.  봉황기 전국 고교 야구 선수권 대회가 '한국의 '고시엔' 이라면, 매년 5월에 열렸던 대통령기 고교야구 대회는 그해 고교 야구의 판도를 예상 캐 해 주던 '시즌 개막전'과도 같았다.  '드롭킥의 명수' 장영철 선수의 "프로 레슬링은 쑈" 폭로 사건 이후로,  프로 복싱과 고교야구 '투톱 체제'로 국내 스포츠 판을 주름잡던 시절의 '시즌 개막전' 이란, '겨울잠'을 자고 있던 야구 팬들의 맥박을 뛰게 하고 가슴을 설레게 하던 '빅카드' 중에 하나였다.

팀의 1번 타자와 1루수 겸 투수로 선발 출전했던 1년생 까까머리 박노준은 투-타에서 정말 눈부신 활약을 하며 평생 기억에 남는 신고식을 하게 된다.  당시 초고교급 투수로 전국 의 고등학교 타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부산상고의 윤학길 투수를 상대로, 15-1이라는 '비 결승전' 같은 점수 차로 물리치는 '선린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대회 MVP로 선정된다.   박노준이 고등학교 1학년 때 경험했던 '스타 탄생' 그 자체였다.

박노준이 확고부동한 주전 투수 겸 3번 타자로 뛰었던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엔 선린상고가 명실공히 '고교 야구 2관왕'의 업적을 쌓는데 주역이 되기도 한다.  1980년 6월 23일 서울 운동장에서 벌어진 '돌풍의 주역' 박동수의 마산상고와의 청룡기 결승전에선 팀 선배 나성국 투수와 '합작'으로 5-0 완봉승을 만들어 내며 또 한번 '대회 최우수 선수'란 큰 상을 타게 된다.  당시 선린상고의 신임 구본호 감독은 결승전에서 위기 때 마다 우익수로 뛰던 박노준을 마운드로 불러 세워 마산상고 반격의 의지를 잠 재웠고, 이와 같은 전술을 경기 도중 4번씩이나 단행할 정도로 박노준에 대한 그의 신임도는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박노준은 매번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며 모교의 11년만의 청룡기 우승을 이끌어 냈다.

그로부터 4개월 후, 고교 야구의 마지막을 알리는 황금사자기 대회… 당시, 고등학교 최고참 선수들인 3학년 생들의 고별 무대이기도 했던 황금사자기 대회는 말 그대로 '최후의 승자'를 판가름 내는 자리였다.  대통령기 우승팀이자 대한민국 '국보 투수' 선동열이 버티던 광주일고, 청룡기 우승팀 선린상고, 화랑대기와  봉황기 우승팀이자 이상군이 이끌던 천안 북일고, 그리고 민관식 투수의 세광고, 이렇게 네팀이 4강에서 격돌했으니… 우승기의 향방을 자신 있게 점치는 전문가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2학년 센세이션' 박노준, 김건우를 중심으로 한 선린상고는 세광고를 물리치고 결승전에 올라 당시 '천하무적'이라 불리던 선동열의 광주일고와 맞붙게 되었다.  '선린상고 대 광주일고'  이 두팀의 이름만 들어도 벌써부터 손에 땀을 쥐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필자의 사담을 곁들이려 한다.  필자와 '피를 나누다시피' 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 놈이 하나 있다.  어린 시절 둘이서 유난히도 야구를 좋아했고 '동네야구의 달인'이라 불릴 정도로 야구도 곧 잘 하던 녀석이었다.  그 친구에겐 '먼 외사촌' 뻘 되는 형이 한명  있었는데, 바로 조금 전까지도 언급을 했던 천안 북일고에서 3루수 겸 5-6번을 치던 '야구 선수 형'이었다.  바로 80년 황금사자기 대회 준결승에서 광주일고의 선동열과 대결했던 그 천안 북일고 소속 선수 '형'이었다.  선동렬 대 이상군… '정상인을 경기 들게 할 정도'로 긴박한 투수전으로 진행되던 준 결승전 경기 후반, 1점 차로 뒤지던 천안 북일고의 김영덕 감독은 바로 그 '친구 형'을 대타로 기용하면서 1루에 나가 있던 주자를 불러 들일 작전을 구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투 스트라익' 잡힐 때까지 선동렬의 볼에 손도 못 대고 헛 스윙만 해 대던 그 '형'이 몇번 파울 볼로 타이밍을 맞춰 나갔다.  친구 녀석과 같이 이 장면을 TV로 시청하던 필자는 '손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과 같이, '제발 한방만..'을 속으로 외쳐 댔다.  그리곤 일이 터졌다.   선동렬의 투구를 말 그대로 '통타' 해서 3루타를 일궈 낸 것이었다.  경기는 동점이 되었고, 친구 녀석과 필자는 부둥켜 안고 '만세'를 불렀다.  그 친구 녀석은 '엉~엉~' 울어 댔다.  경기를 연장전까지 몰고 가게 했던 '회심의 3루타' 였지만, 천안 북일고는 결국 선동렬의 광주일고에게 백기를 들게 된다.  필자가 이런 극히 사적인 일화를 이 자리에서 얘기하는 이유는, 바로 당시 선동렬 선수가 보여 주었던 고교 야구 판에서의 '압도적 지배 (domination)'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다.  필자의 친구가 흘린 그 감격의 눈물은 모름지기 '천안 북일고가 동점을 만들었다.' 라는 기쁨에서 라기 보다는, '선동렬의 볼을 쳤다.  그것도 우리 형이…' 라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 만큼 당시 선동렬의 볼을 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동렬의 광주일고가 한 게임이라도 지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의 공은 정말로 무시 무시했다.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야구 팬들이 그 당시의 고교 야구를 사랑했던 이유도 아마도 이런 '아마츄어 야구의 의외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광주일고와 결승전에서 맞붙은 선린상고… '과연 선린의 저 어린 타자들이 선동렬의 볼을 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모든 이들의 관심 거리였고 승부의 관건이었다.  4타수 3안타 3득점 3타점 1홈런… 이게 바로 선린상고 3번 타자 박노준의 이날 기록이었다.  4 2/3이닝, 피안타 2, 사사구 3, 탈삼진 8, 실점1, 자책점 1…. 이게 바로 선린상고 릴리프 투수 박노준의 이날 기록이었다.  박노준은 날랐다.  1점 차 박빙의 승부를 이어가던 8회말,  타석에 나선 박노준의 쐐기포 2점 홈런은 한 걸음씩 반격 해 오던 광주일고의 등을 꺾어 놓았고, 5-3이란 스코어로 선린상고는 1980년 전국 대회 2관왕의 대 기록을 세우게 된다.  박노준이 쏘아 올린 투런 홈런은 다름 아닌 '괴물 투수' 선동렬로부터 얻어진 것이었다 …

2학년을 이렇게 '알차게' 장식한 '선린 야구'는 무서울 것이 없을 정도로 막강한 기세로 박노준의 3학년, 마지막 시즌을 맞게 된다.   야구 문외한이 보더라도 1981년 '선린 야구'의 전망은 밝았다.  팀의 주축 멤버였던 박노준-김건우의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고 봤을 때, 그들의 전국 대회 '독식 행진'엔 걸림돌이 없는 듯 싶었다.  '바뜨' (but) 그러나…군산상고의 '불의의 일격'으로 초반 탈락했던 대통령기 대회,  '그래 이제 정신 차리고 실력대로 한번 싸워보자' 라고 결심하고 나섰던 청룡기 대회에선 '천적' 경북고에게 12회 연장전 패 (5-6), 그리고 앞서 언급한 '운명의 봉황기 결승전'… 그렇게 '선린 야구'는 끝이 났고, '박노준의 고교 야구 전설'도 그쯤에서 마침표를 찍게 된다.  

선린상고 팬이 아니었던 필자 (그렇다고 북일고 팬도 아니었지만)가 기억하는 '선린 야구'의 매력은 무엇이었나…?  이 기사를 쓰기에 앞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곤 세가지 정도로 요약 해 보았다.  첫째, 그들의 출현은 무엇보다도 신선했다.  고등학교 1-2학년 선수들이 팀의 핵심 멤버가 되어서 상대 팀 선배들을 요리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박수를 안 칠 수가 없었다.  스포츠 팬 대부분의 심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약자 또는 다윗 옹호증' 때문 이었을까?  둘째, '선린야구'는 하모씨 표현대로 '짜임새 야구'와 '선이 굵은 야구'의 적절한 조화였다.  교타자들의 출루타와 현란하게 이어지는 주루 플레이, 그리고 중심 타선의 '싹쓸이 중거리 포'가 유난히도 잘 맞물려 있던 야구였다.  투수력에 있어선 '초장부터 박살을 내는 시원 시원한 피칭'을 선보였다.  타 팀과 같이 '부동의 에이스 1인 체제'가 아닌 '투톱 시스템' (김건우-박노준) 역시 색 다른 구조였다.  마지막으로, '선린 야구'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성원을 받았던 이유는 아마도 이상 야릇하게 풍겨 나오는 그들만의 '외인구단 성' 팀 컬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이, 포지션, 타순을 다 떠나서, 그들에게선 승리를 향한 '하나 된 응집력'이 돋보였다.  우승 순간이 확인 되기 전까진 그 어떤 '오버 액션',  '세레머니' 또는 '함박 웃음'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무슨 '이기기 위해 모아 놓은 기계들' 같은 느낌마저 풍겼다. 그리고 그런 '선린 야구'의 이미지 메이킹에는 박노준의 '눌러 쓴 모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평생 서로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 해 왔지만 각자 다른 길을 걸어 오다가 결국 구치소 안에서 재회하는 두 친구, '태수' (최민수 역) 와 '우석' (박상원 역)의 '모래시계' 속의 대화 한 장면이 기억 난다.  '"그 다음이 문제라고.. 그 다음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고…"  그 어떤 스포츠 스타의 사진 중에서도 '선린 야구' 박노준의 발목이 돌아 간 그 한장의 사진만큼 한 선수의 인생을 신랄하고 간결하게 잘 나타내 주는 사진을 볼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박노준에게는 '그 다음'이 없었다.  박노준을 모셔오기 위해 연-고대의 과열 된 스카웃 파문도 있긴 했고, 선동열과 '쌍두마차 '를 이루며 고려대 전성기 시절을 구축하기도 했고, 82년 서울 국제 야구 대회에서 만세를 부르며 덕아웃을 뛰쳐나오던 '태극 전사' 중 한 사람이 되어 보기도 했고, 역대 타자 최고 계약금을 받고 프로 무대에서 뛰어 보기도 했지만… '선린 야구' 를 빛내던 '고교야구의 기린아' 박노준의 '그 다음' 야구 인생은 반쪽짜리에 불과 했다.


'반쪽짜리 인생의 서곡'

81년 10월. 부러진 발목도 어느 정도 아물어 가고, 박노준의 기구했던 고3 시절도 마지막 페이지에 달하게 된다.  우리나라 대학 스포츠의 '양대 산맥'인 연세대와 고려대, 고려대와 연세대의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 '스카우트 전쟁'은 극에 달하게 되지만, '고3 최대어' 박노준의 행보는 안암골 '호랑이 굴'로 향한다.  '천적' 경북고의 최무영, 서울의 라이벌 신일고의 민경삼, 서효인과 함께 말이다.  반면, 연세대는 진흥고의 좌완 에이스 김정수, 부산고의 대형 포수 김성현, 박노준의 선린 동료  이경재를 확보하는데 만족해야 했고, 박노준의 '10년 지기' 김건우와 '선린 킬러' 성준은 한양대에서 다시 만난다.  

박노준이 고려대에 입학하던 82년… 우리 나라 야구계엔 '프로 야구 출범' 이란 새로운 반환점을 맞이하면서 야구 팬들의 관심사는 한 순간에 '프로'로 이동한다.  동시에 '고교 야구의 종말' 이란 뼈 아픈 행정 착오도 초래하면서 말이다.  그해 가을,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서울 국제 야구 대회를 겨냥한 어우홍 감독의 국가 대표 야구팀에는 몇 안 되는 대학 선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박노준이었다.  간간이 대타 겸 릴리프 투수로 경기에 나가서 우리나라가 일본을 상대로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출 하기까지 일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대회에서 박노준이 얻은 것은 '군 면제'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실, 그 이상을 기대 하는 것도 대표팀 막내둥이 박노준에게는 무리한 요구였겠지만 말이다.

군 복무 문제를 깔끔히 해결한 박노준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1인 다역'의 임무를 계속 한다.  봄, 가을에는 고려대 경기에 출장했고, 여름, 겨울에는 대표팀 훈련 및 대회에 참가 하면서…  한-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대륙간 컵 야구 대회, 아시아 선수권 대회, 그리고 84년 LA 올림픽 시범 경기..등, 굵직한 국제 대회에는 변함없이 선발되었고, 누구보다도 제 임무에 충실 하였다.  '임무 충실'… 어쩌면 이 말 하나 때문에 박노준의 야구 인생은 '반쪽'으로 끝이 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고려 대학 시절 4년 동안 박노준은 던지고 또 던졌다.  '대학시절 박노준만큼 안 던진 에이스 투수가 몇이나 되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박노준은 던지지 않는 날엔 타석을 빛내야 했고, 투수들 쉴 때는 '펑고'를 받아야 했다.  그 당시 박노준만큼 많은 경기를 뛴 대학 스타는 분명히 없었다.  국가대표 경기를 제외한 4년 간의 고려대 통산 기록을 정리 해 봤다.

피   칭

타   격

년도

게임

승패

방어율

82

7

2패

3.00

83

15

5승2패

1.07

84

24

9승1패

2.36

85

18

4승5패

3.25

게임

홈런

타점

타율

33

0

10

0.236

12

0

3

0.225

26

2

19

0.310

25

7

20

0.319

이닝 수로 따지자면 박노준의 3,4학년 출장 이닝 수는 각각 103.3 이닝과 61.3 이닝에 속한다.  대학 투수 중 2년 통산 최다 이닝 수 였다. 4학년 선배 선동열의 팔꿈치 부상으로 생긴 고대 마운드의 공백은 3학년 박노준의 독차지였고, 워낙 가슴이 약했던 고 최남수 전 고대 감독의 '박노준 의존증'으로 말미암아 약체 서울대와의 경기에까지 출장을 시키게 했다 (후추 노컷 인터뷰 참조). 결국 무리한 연투로 인해 대학 4학년이 되던 85년 7월, 박노준은 생애 두번째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팔꿈치 및 어깨 고장'으로… 서서히, 아주 서서히 고등학교 시절의 '쌩쌩하던' 박노준의 팔은 망가져 가는 것이었다.


'만신창이 12년'

박노준은 회고한다.  타자 또는 투수로만 프로 무대에서 뛰었더라면 국내 프로 야구 기록 하나쯤은 달성하고 은퇴 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그 말을 믿는다...  

박노준이 '프로 진출이냐? 실업 행이냐?'을 놓고 고민 하던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프로 야구 팀의 무지한 '스카우팅 (Scouting)'작업에 필자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선린중학 1학년 때부터 줄기차게 '혹사' 당해 온 박노준의 팔을 믿고 당시 MBC와 OB 간의 영입 작전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물론 지명도 면에서 그 만한 '대어'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박노준을 1순위 지명에서 놓친 팀을 위해서 '2명 연속 지명'이라는 편법까지 도입되는 코메디를 연출 하기도 했다.  결국 OB가 박노준을 지명하게 되고 MBC는 김건우, 이재홍, 민경삼, 서효인…등 역대 최강의 '루키 진'을 확보하게 된다.  그 후로도 박노준은 7번에 걸친 연봉 협상 결렬로 인해 처음부터 순탄치 않은 프로 생활을 예견하게 해주었다. 85년 12월 말일까지 연봉 및 계약금이 구단과 합의 되지 않는다면, 몇 가지 시나리오가 박노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 진출을 깨끗이 포기하고 88년도 까지 아마 (실업)에 남아 있다가 서울 올림픽에 출전하여 명예로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야구계를 떠난다는 시나리오 하나와 '군 복무' 였다.  82년 '한대화의 한방'으로 군 면제 혜택을 받은 박노준은 관계 당국이 병역특례자의 프로 진출 허용 기간을85년 말로 못 박아 놓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불 보듯 뻔한 결과를 놓고 양자 간에 소모전을 계속 하던 것이었다.  12월 30일 에 결국 계약금 5,000만원 (역대 타자 최고 대우), 연봉 1,200만원 (신인 연봉 상한선)에 합의하고 박노준은 OB에 입단하게 되지만, 'OB 행'으로 말미암아 박노준의 프로 인생 12년은 전혀 그가 뜻하지 않던 '길'을 걷게 된다.  

박노준의 OB 입단 동기 중 서울고 출신 좌완 투수 박형렬 선수를 제외하곤 마땅한 투수가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당시 OB 감독 김성근 씨는 '비록 드래프트 당시에는 투수 박노준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팀 사정 상 어쩔 수 없이 다시 투-타 겸업을 시키기로 했다' 라는 결정을 내린다.  참, 요즘 프로 선수들이 들으면 '칼 들고 설칠 일'이 아닐 수 없다.  메이저 또는 일본 프로 야구에도 보기 드문 '투타- 겸업', 일찍이 국내 실업 무대에선 고 임신근 전 해태 코치가 한번 시도해서 타자로서도 각광을 받을 일이 있지만, 100경기 넘는 프로 야구의 장기 레이스에서 '투-타 겸업' 이라는 개념은 '선수 조지기로 작정한 사람의 발상'이라고 밖에 판단되지 않는다. 대학 4년 동안 무리수를 띄워 가며 하루 하루를 노동해야 했던 '1인2역'의 박노준… 프로에 와서도 똑 같은 방식으로 상대방 선수들과 대결해야 한다는 운명에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펼쳐진 1986년 프로 야구 시즌… 81년 고교 야구 판을 뒤 흔들던 박노준과 김건우, 그리고 성준…등의 '고교 스타'들이 다시 한번 팬들의 '스포트 라이트' 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누벼 주었던 그 한해 성적을 놓고 보자면… 박노준은 '판정패'를 면하지 못했다.  인기도나 지명도로 보았을때 '만년 2인자'축에 속해 있었던 김건우 선수가 'MBC의 희망'으로 우뚝 솟아 오르면서 그해  신인왕을 거머쥐었고 (18승6패 - 방어율 1.80), 성준 선수는 '제2의 김일융' 이란 소리를 들으며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15승5패2세 - 방어율 2.36).  '투-타 겸업'을 시도했던 박노준은 성적은 5승6패7세이브 (방어율 2.28)로  신인치곤 극히 희망적인 성적을 냈지만, 나머지 두 라이벌의 성과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그 뒤 1년간 더 '두집 살림'을 꾸려 나갔던 박노준이었지만, 예전의 화려한 결과는 꿈도 꿀 수 없었고, 타격마저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88년 스프링 트레이닝 당시, 박노준은 타자로서 '외길 인생'을 선언하고 피나는 훈련을 거듭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던 팀의 에이스 박철순 선수의 '아킬레스 건 파열'로 인해 또 다시 '투-타 겸업'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 가지 분야에서도 국내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가 '하늘의 별 따기' 이상으로 힘든 판국에, 팀의 사정에 따라 '이것도 찔끔, 저것도 찔끔' 한다는 것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터득하기 까지 정확히 '3년의 방황', 그리고 이광환 이라는 새로운 감독 영입이 필요했던 것이다.  박노준의 방황은 통산 전적 5승7패7세 - 방어율 3,25 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끝이 나는가 싶었다.

박노준은 항상 투수이길 원했다.  그가 투수의 길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후추 노컷 인터뷰'에서 본인에게 직접 들어 보기로 하고, '전업 타자'로 변신한 박노준의 '화려한 부활'을 가로 막은 두번째 요인이 또 그를 기다리고 있을 지에 대해선 본인 자신도 몰랐다.  바로 '부상' 이었다.  아… 박노준에겐 이 얼마나 지긋지긋한 단어인가?  필자가 박노준의 야구 인생을 '반쪽'이라 결론 지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고등학교 시절처럼 투수와 타자란 두 분야에서 모두 특출한 성적을 내지 못 해서가 아니라, 그의 야구 인생은 '아마츄어'에서 끝이 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니, '프로 야구' 라는 좀 더 가능성 있고 빛나는 무대에서는 그의 '무지막지'했던 잠재력을 '반' 밖에 보여주지 못 하고 글러브와 방망이를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프로 야구 선수 박노준'은 슈퍼스타가 아니었다.  본인도 주위의 이런 평가에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어떠한 잣대로 평가한다손 치더라도 프로 선수로 그가 뛰었던 12년은 '그저 그런 성적' 뿐이었다.  특히, 선린 야구 시절의 그의 명성에 비하면 더 더욱이 그렇다… 한 '영웅의 몰락'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 '천하의 박노준'의 야구 인생을 망하게 한 원인은 무엇인가?  한가지도 잘 하기 어려운 프로 무대에서 두가지를 잘 하겠다는 욕심부터가 문제였고, 또 그래 주기를 요구했던 구단 환경이 그의 프로 초창기를 망쳤다고 본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바로 '이골'이 나도록 찾아 드는 '부상의 악령'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부상을 '관리' 하지 못한 그 첫번째 책임은 바로 박노준 자신에게 있다.  이 점만은 그 누구도 절대 부인할 수 없다.  '프로 선수의 몸'은 '돈'이라고 한다.  그는 '돈 관리'를 잘못한 낙오자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박노준과 같은 경우를 놓고, '선수 혹사' vs. ' 자기 관리 실패' 란 논쟁을 밤 세워가며 펼칠 수 있는 것이 우리 야구의 현실이다.

87년 어깨 부상 재발, 88년 손등 뼈 골절, 89년 손 가락 뼈 골절, 92년 왼쪽 무릎 부상, 93년 갈비 뼈 부상, 94년 허벅지 근육 파열, 96년 무릎 십자 인대 파열… 박노준의 '부상 일지'다.  뭐가 하나 부러지고 파열 될 때 마다 '그해 장사는 땡 쳤다' 라고 볼 때, 박노준의 프로 야구 인생은 시작도 제대로 해 보지도 못 하고 끝나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 큰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운동 선수들은 '혹사' 라는 '재앙'에 시달리고 있다.  프로 야구가 출범한지 20년이 가까워 진 오늘날에도, 아니 '고교 야구의 황제' 박노준을 그렇게 떠나 보낸 지 몇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말이다.  

91년 12월 2일, 박노준은 해태의 이광우와 전격 트레이드 된다.  그리고 1년 뒤, 이번엔 백인호와 함께 쌍방울로 현금에 팔려 간다.  이 때만 하더라도 이미 필자의 마음 속에 '박노준'이란 이름은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전형적인 '못 다 핀 꽃 한송이'로 기억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더 큰 관심을 쏟을 '용기'가 없었다.  더 이상 추락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관심을 '끄려고' 했다.  그러다가 96년 어느 여름 날, 텅 빈 쌍방울의 전주 구장에서 홈런을 쏘아 올리고 고개를 깊이 파 묻은 채  절룩 거리며 베이스를 돌던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쫄딱 망한 쌍방울 팀의 재정난으로 인하여 선수 층도 두텁지 못했고, 무릎 십자 인대가 끊어져도 쉴 수가 없었던 그런 암울한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 하던 박노준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곤 15년 전, 광주일고 선동열의 슬라이더를 통타 해서 우측 펜스를 넘긴 후 온 국민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다이아몬드를 돌던 그의 모습이 떠 올랐다.  '아름다운 시절의 아름다운 야구인' 박노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프로 통산 2할6푼2리, 28 홈런, 288 타점, 141 도루 란 기록을 남기고 그는 '반쪽짜리 야구 인생'을 마감했다.


나머지 반쪽을 찾아서…

필자가 잠시 홍콩에서 생활할 때, 우연히 인터넷 신문에서 박노준의 근황을 들었다.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의 마이너 리그 팀의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고.  물론 대부분의 국내 은퇴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자비를 톨톨 털어서 짐 싸 들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LG의 김용수 선수가 프로 야구 선수 최초로 '영구 결번식'을 갖는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곤... 박노준 선수의 은퇴 모습은 어떠했을까..하고 생각 했다.  박노준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대 스타들도 헌 신짝 내다 버리듯 낮 뜨겁게 내쫓는 그런 더러운 우리 야구 풍토에서 '보잘 것 없는' 박노준의 은퇴식을 해줬으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박노준의 '반쪽자리 야구 인생'에 대해선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고, 제일 아쉬워 한다.  '후추'고 나발이고 본인만큼 가슴 아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선 것이다.  아니, 그 못 채운 '반쪽'을 채우기 위해서 그는 예쁜 두 딸 '혜연'과 '혜상'을 뒤로하고 미국 땅으로 향한 것이다.  97년을 끝으로 국내 리그에서 은퇴 한 후, 그는 캐나다에 짐을 풀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마이너 리그 팀 '세인트 카타린' 이라는 팀에서 작전 코치로 시작을 했다.  그리고 올해 초, 그는 다시 뉴욕 메츠의 마이너 리그 팀에서 작전 및 주루 코치 공부를 했다.  그리고 지난 9월 말 서울로 돌아 왔다.  그가 지난 2년 간 '큰 물'에서 보고 배운 것은 너무나 소중한 교육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뭘 그리도 잘 가르치나? 에 대한 터득보다도, '우리가 뭘 그리 잘못 가르치고 있나?'에 대한 공부가 더 값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점에 대해서 그는 참 할 말이 많았다 (후추 노컷 인터뷰 참조).

그리곤 그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제2의 박노준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요즘 그는 또 한번 자비를 털어 전국을 돌며 '무료 야구 클리닉' (문의: 02-544-1231)을 실시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박노준처럼 고교 야구를 점령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부상을 방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다음'을 찾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우리 야구의 새싹들에게 전수하기 위해서 말이다.  

[특별부록] '박노준 무료 야구 클리닉' 탐방기도무지 '박노준은 어떤 지도자의 모습으로 제자 (?) 들을 가르치고 있을까…?' 가 제일 궁금했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12월6일 오전 도봉역 근처에 위치한 성균관 대학교 야구장을 찾았다.  야구장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박노준의 모습이나 운동복 차림의 학생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1시간 넘게, 그것도 월요일 아침부터 이 먼곳을 찾아 왔는데.. 이거 망하는 분위기…??'  하는 수 없이 옆에 있는 성대 체육부 숙소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한분을 붙잡고 야구 교실에 대한 문의를 드렸더니, '따라 오쇼…' 하면서 필자를 숙소 내 식당으로 안내했다.  이미 그곳엔 2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래, 이론 교육부터 하겠지…' 그제서야 필자의 아둔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올 시즌 몸 담았던 뉴욕 메츠 팀의 점퍼를 걸쳐 입고 운동복 바지에, 흰 운동화를 착용한 박노준… TV 화면을 가리키며 무언가 높지 않은 목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바로 뉴욕 메츠의 트레이닝 / 재활 담당 '닥터'가 만든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기법 ' 비디오물을 보면서 하나씩 설명 해 주고 있었다.  2시간 이상 되는 이 비디오 자료를 보면서 박노준이 거듭하는 말은 "한 동작을 하더라도 '정 자세'로, 지겹지 않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야구 선수들이 쓰는 근육을 부위 별로 강화 시켜주는 훌륭한 데모 테이프 같았다.  같은 어깨 부위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각도에서, 정말 '힘줄' 까지 강화 시켜줄 것 같은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간간이 뉴욕 메츠의 선수들도 '찬조 출연' 해서, 비디오 물의 재미를 덧붙여 주었고, 메츠의 주전 유격수인 '레이 오르됴네즈' 선수가 나왔을 때 박 코치는 재미있는 '여담'도 풀어 놓았다.  "이 선수가 쿠바에서 망명한 선수인데, 워낙 선수들 감시가 심하니까 얘가 택한 망명 수단은… 미국에서 열렸던 미국 대 쿠바 야구 시합 중, 공-수 교대 할 때, 서서히 유격수 위치로 뛰어 나가더니 갑자기 유격수 위치에서부터 좌익수 뒤 펜스까지 전력 질주 해서, 담을 뛰어 넘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곤 펜스를 뛰어 넘자마자 '나 망명한다!!' 라고 외쳤대요.  유격수 자리에서부터 그 펜스까지의 거리를 뛰어 갈 때는 10년보다도 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오전 강의를 마친 '학생'들 (신일고 및 성균관대 야구부원, 그리고 일반 코치들)은 간단히 근처 '청요리집'에서 자장면을 한 그릇씩 비우고 오후 강좌에 들어갔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인 야외 교육… 먼저 베이스 러닝, 번트, 타격…등, 철저히 '기본기 위주의 커리큘럼'을 준비하고 있었다.  베이스 러닝 교육 같은 경우는,  너무 기초적이라서 지겨운 정도는 아니지만, 선수들이 금방 잊어 버리기 쉬운 포인트들을 집중적으로 설명 해 주었다.  예를 들어, 안타치고 나가서 1루 베이스를 돌 때 밟아야 하는 베이스 모서리 위치,  주자가 1루에서 리드하는 방법, 부상 방지 슬라이딩 요령…등.  어쩌면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수 없이 반복하는 기본기 교육 지침을 그대로 옮겨 다 놓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노트북 안에는 크고 작은 그림과 교육지침 내용이 빽빽히 자리 잡고 있었다.

3-4시간을 같이 했던 '박노준 무료 야구 클리닉'을 참관하면서, 참 좋은 일을 하고 있는 박노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기타 기업이 주관하는 야구 교실처럼 요란하게 홍보도 못했지만,  야구를 좋아하고 박노준을 기억하는 '소수정예' 그룹을 모아 놓고 열심히 가르치는 박노준을 보면서 그의 '반쪽'이 서서히 채워져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일도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할 겁니다.  사람이 많이 안 모여도 상관 없습니다.  단1명만 나와도 할 겁니다."  필자의 가슴은 따뜻해 지고 있었다.  박노준의 씩씩한 '부활'을 바라 보면서,  그리고 그의 말을 일일이 노트하며 경청하던 어린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후추 노컷 인터뷰

박노준의 핸드폰 번호를 어렵게 구해낸 필자는 정말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노준이 아닐 것이라고 혼돈할 정도로 무척이나 부드럽고 세련된 그의 목소리에 일단 한번 충격을 받았다.  그의 전화 받는 매너는 처음부터 워낙 사무적이고 빈틈 없어서 이런 저런 취재의 배경 설명할 여유도 없이  약속 장소와 시간만 정하고 끊었다.  그래도 순순히 인터뷰에 응해 준 것만으로 위안을 하면서 말이다.  목동에 거주하고 있는 그를 만나기로 한 지난 2일… 필자는 마치 '옛 스승을 만나러 가는 제자'의 들뜬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약속 장소였던 국민은행 앞 건널목 저편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박노준의 모습을 보면서 두번째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이라곤 앞 머리 사이 사이에 자리 잡은 약간의 흰 머리 정도?  어느덧 40줄을 바라보는 박노준도 세월 앞에는 어쩔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나서 잠시 동안 그간 '후추'의 취재 활동과 창간 취지, 그리고 명예의 전당의 목적..등을 설명 받은 후에야 그의 표정이 좀 부드러워 졌다.  "아이고… 저 보다 더 훌륭한 선배들이 많은데..' 하며 겸연쩍어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실 지난번 전화 통화 할 때, 박노준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취재를 하고 싶다는 필자의 요구를 '그건 곤란합니다.' 라고 단칼에 짤라 버린 이유도 자연스레 설명 되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아파트 내부 공사 중이라서 앉아 있을 자리도 마땅치 않다고 했다.  "한 30분 정도 밖에 시간이 없다." 라고 하던 그의 첫 대답과는 달리, 2시간 가까이 많은 얘기를 정말 즐겁게 했다.  필자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뿌듯하게 생각하는 점 중에 하나는, 이런 지나간 스타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잃어 버린 시간'을 잠시나마 돌려 주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박노준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린상고 시절' 얘기를 하면서 그는 특유의 왼손 스윙도 연출 하기도 하고, 피칭 와인드 업도 재현해 가면서 잔잔하지만 활기 찬 자세로 인터뷰에 임해 주었다.  다음은 후추 명예의 전당 제 7호 헌액자 - 박노준과의 'No Cut 인터뷰' 전문 이다.

이런얘기 저런예기

 가족 분들이나 형제분들은 어떻게 되세요? 

  형제보다도 가족. 와이프하고 4학년, 1학년 딸만 둘 있어요. 11살, 8살

 사모님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어~ 전 윤 주.

  몇 년도에 결혼 하셨어요?

 87년. 87년

 따님들 이름 좀…

 혜연, 혜상. 은혜 혜자…

 이렇게 뵈니까 운동하신 분 같지가 않아요.

 왜요? 하하하.

 어쩜 그렇게 정말… 아주 차분하시고…

 아유 그렇지 않아요. 뭐, 요즘 은퇴 한지 2년 되니까 좀 여유가 있어요.

 술 많이 하세요?

 술 안 해요.

 원래 안 하세요?

 안 맞아서 안 해요. 분위기 맞출 수는 있어요. 기본체력이 있어 가지고 밤새도록 마시면 마실 수는 있어요. 즐겨 마시거나 일부러 사서 마시고 그러진 않아요.

 고향이 어디세요?

  전남이요. 전남 목포요.

 국민학교는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서울 봉천초등학교요.

 t선천적으로 왼손이셨어요?

 예

 식사도 왼손으로 하십니까?

 아~  가위질하고 공만 왼손으로 던지고, 나머진 전부 다 오른손이예요. 골프도 왼손으로 하고.

 골프도 왼손으로 하십니까? 잘 치세요?

 그거를 타자동안 치면은… 선수 때 치면, 욕먹으니까 안쳤는데 코치나 감독되면 쳐야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작년 초에 플로리다 가 가지고 처음 시작했어요. 들어가면 코치들이 틈만 나면 골프 치러 가자고 그러고 문만 열고 가면 골프장이니까… 작년 올해 많이 쳤어요.

 왼손으로요?

 왼손으로 쳐요. 골프가 이게 오른손 위주로 이… 골프클럽이… 또 … 필드가… 그래서 왼손이 좀 불리한데 제가 뭐 선수할거 아니고… 왼손으로 칩니다.  

  스윙은 그대로 시겠네요.

 뭐 골프스윙하고 야구스윙하고… 똑같지는 않지만 많이 비슷하죠.

 그런데 이렇게 뵈니까 외람된 말씀인데… 코는 여전하시네요.

 오우, 예… 하하.

  젊으셨을 때 그 약간 '매부리 코'랑 똑같으시네요.

 하하


옛날 이야기

 어렸을 때 야구하시면서 굉장히 좋아하는 선수나 '우상'이 있었나요?

 그때 당시는 TV나 이런 걸로, 뭐 아마야구 활성화가 그렇게 되질 않아가지고 좋아하는 선수… 없었고, 일본의 장훈 선수가 있었어요. 잘할 때니까 신문에도 많이 나고, 방송에도 많이 나고,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장훈 선수를 굉장히 존경해왔어요. 나중에 만나는 영광도 겪었고.

 언제 만나셨어요?

 제일 먼저 만난 것이 81년 12월달 롯데호텔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 다리 다쳐 가지고 퇴원하고 나와 가지고 롯데호텔에서 TV 방송국에서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어요. 그때 처음 만났고 그 후로 어~  93년? 93년도에 장훈씨가 전주에 왔어요 쌍방울 팀에 와 가지고 한 1주일간 김기태 선수와 같이 지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때 많이 배웠어요.

 아 그랬어요?    그럼 아마시절이나 프로에 오셔 가지고 가장 기억에 남는 감독님이나  지도자 분 계세요? 워낙 많으셨잖아요?

 많았죠. 제일 그래도 인정해주고 그나마 좀 기술적으로도 많이 이렇게 조언해주신 분이 이광환 LG감독이었죠. 일본1년, 미국 1년 공부하시고 오셔 가지고 OB 감독으로 들어 왔는데 그때 좀 많이 배웠어요. 그때 이제 난 투수하다가 어깨를 다쳐 가지고 방망이로 돌 그런 기로에 섰을 때, 과감하게 그때 당시의 오비 베어스 센터필더 박종훈 선배라고 있는데 그 선배를 밀어내고.. 아주 방망이를 잘 치고 그랬었는데, 저를 갖다가 그 자리에 딱 박더라고요.

 신인왕 출신이시잖아요.

  박종훈선배 그 바람에 은퇴했어요.^^ 그 후로 이제 10여년간, 딱 10년간 뛰었는데… 자기 알아주는 사람이 제일 기억에 남죠. 그때 그렇게 안….. 주전으로 붙박이를 안 시켜줬으면 그렇게, 오래 못 했을 수도…. 못 했을 거에요. 또, 일본1년, 미국 1년 역시 공부하고 오신 분이라 마인드가 틀리고 가르치는 방식이나.. 이제는 저도 작년, 올해 2년 갔다 왔지만 그동안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선수 위에서 군림하는 그런 지도자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게 먹혔고, 이제는 제가 현역할 때 9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세대가 바뀌면서 위에서 누르려고 하면 선수들이 안받아들여요. 예, 역효과가 나요. 그러니까 선배 입장에서 신인들이 들어왔을 때 옛날에는 쥐어박고 그러지 않고 살살 다독거려줬더니 더 잘하더라고요. 말도 잘 듣고. 어, 예의도 바르고. 그런데 옆에서 이렇게 막 누르려는 선배들한테는 그렇게 안하더라고요. 아, 내가 지도자가 되면 어떤 식으로 해야겠다는 걸 그때 느꼈고, 또 이번에 가서 2년 있으면서 걔네들이 애들을 가르칠 때, 가르치는 걸 보니까 감독, 코치는 위에서 군림하거나 이끌어가는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선수들이 잘 운동하고, 게임하고 할 수 있게끔 장판 깔아주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Support. 도와주는 거죠. 그러니까 선수들이 존경하고 친구처럼 해도 많이 자문을 하고, 자문해주는 거에 대답을 해주고 아주 신뢰하고 기술 이전도 잘 되고… 우리는 아직까지도 요번에 와서 보니까 아직까지도 앞에서는 하라고 하니까 하죠.  "네" 하고, 돌아서면 욕을 하니까.  그건 굉장히 서글픈 거에요. 그래서, 그런 것… 그런 것 자체부터 해 가지고 획기적인 그런 생각이 들어가지고 이광환 감독을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존경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리틀 야구도 하셨죠 ? 그때는 국민학교 때 하셨습니까 ? 중학교 때, 선린 중학교때 대만에도 한 번 갔다 오셨다고… 일본인가 ?

 괌. 초등학교, 그때… 원래 그게 나이 제한해 가지고 가는데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제가 나이가 해당이 되가지고 리틀야구에 선발이 됐어요. 선발이 되가지고 괌에서 극동지역 아시아 예선전을 해요. 미국에 가서 하는 월드시리즈 리틀야구 예선전을 하는데 일본, 대만, 괌, 필리핀, 우리, 태국인가?… 그래 가지고 하는데 그때 76년도까지.. 70년대 초부터 시작을 해 가지고 대만이 한 번도 아시아지역이고, 월드 참피온 시리즈고 진 적이 없었는데 그때 저희가 처음 이겼어요.

 2-0으로 완봉승 했다고…

 -0 완봉승인데, 그때 전 중학교 6개월정도 뒤에 먼거리 마운드를 던지다가 초등학교 거리에서 다시 던지라 그러니까 포수가 못 잡어요.  포수가 초등학교 6학년 짜린데, 제가 중학교 1학년. 못 잡아요. 변화구를 전혀 못 잡고, 직구만 던지는 데도 못 잡아요. 가서 "너 글러브만 대고만 있어라. 대고만 있어라." 그때 걔들이, 대만 애들이 우리보다 머리가 하나씩 다 컸어요. 그 전까지, 그 전에까지 뭐12-0, 15-0 막 이랬대요. 치면 넘어가고. 근데 한국에서 그때 "데리고 가자." 해 가지고 절 데려가서… 근데 그걸 2-0으로 이겨 가지고 대만이 발칵 뒤집혔대요.

 그래서 그때 대만, 그 후로도 전지훈련 가고 그러시면 박코치님 알아보고 그런 분이 있다고 그러던데요…

 대만 이름으로 제 발음이 '부르진'이 나와요. 그래 가지고 대만만 가면, 그 후로 대만을 대표단 게임, 캠프 이것저것 해 가지고 13번을 갔는데 갈 때마다 거기 야구인들은 환영을 해 줬어요.

 어릴 때 꿈은 원래 야구선수였어요 ? 아니면 ?

 어렸을 때 꿈은 정치를 하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정치를 하고 싶었어요. 지금도 정치에 관심이 많고. 예, 그런데 이렇게 됐지만은 앞으로는 내가 그때 그러고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지나면서 비즈니스를 해야 되겠다. 사업을 해야 되겠다. 남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든, 뭘 하든 그런 게 굉장히 관심 있고 재밌겠더라고요. 나름대로. 학교도 고대 들어갈 때도 다른 사람들은 체대, 물론 뭐 경영학과나 법대 간 사람도 있긴 하지만 체대가면 아무래도 교사 자격증도 나오고 학점 따기도 쉽고 그렇거든요, 아무래도. 다 그런데, 전 경영학과를 갔지요. 그래서 고생 많이 했어요. 학점 딴다고. 유급 될 뻔도 하고 그랬는데. 교수들 찾아다니고 사정하고 빌고. 조교들 꼬셔서  답도 좀 알아내고.. ^^ 그렇게 해 가지고 간신히 졸업을 했죠. 경영학과, 어렵게 땄어요. 고생한 만큼 보람도 있고 친구들이, 에, 어른들이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라고 그래 가지고 법대, 경영대 애들 많이 사귀었죠. 변호사, 검사, 사업하는 친구들 많이 있는데 그 친구들이 많이 도와줘요. 네. 지금 현재 실정이 어떻고 나라가 어떻고 앞으로 하려는 아이템, 장사할 게 뭐가 있고 그런게 자산이죠. 언젠가는 그러면 운동을 하면서도, 왜냐면 돈이 없으면 소신껏 지도자 생활도 못해요. '그래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다음에 해야 되겠다.' 외도한다는 것이 아니고…..

 예전에 부모님들은, 선친께서 직업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

 아, 저희 부친께서는 전형적인 그, 회사원.. 직장인.

 아버님께서 야구하는데 반대는 안하셨습니까 ?

 아이, 안하셨어요. 저희 어머님은 반대를 좀 했어요. 괄괄하셨어요, 어머님이. 활동적이셔서 부동산을 하셨어요. 지금도 부동산 중개업 그걸 하고 계시고,  봉천동 서울대학교 후문, 관악산 쪽에 땅 정지작업 다 해 가지고 집 다 지어서 팔고 지어서 팔고해서… 이런 거...


선린야구

 선린상고에 대해 몇 가지 여쭤볼께요. 선린 야구 스타일을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거 같아요 ? 선린 야구의 팀컬러를. 당시 뛰실 때.

 전통이란 무시 못해요. 네. 전통, 한마디로 역시 전통 있는 야구는 야구, 농구면 농구 전통 있는 학교 가서 졸업을 하고 연결이 되는 것을 보면 현역 때 학교 있을 때는 전통 있는 학교 같으면은 다른 학교에서는 없는 그런 게 있어요. 그 학교 특유의 팀 칼라 라든지, 끈끈하게 물고 늘어지는 거라든지 타격이라든지, 팀웍이라든지… 이런 게 있는데 선린상고는 굉장히 군기가 셌었어요. 하루도 안 맞고 교문을 나가는 적이 없었어요.

 그때 감독님이 구본호 감독님이셨죠 ?

 선린 중학교, 선린상고가 무지하게 빠따가 셌어요. 군기가, 군기도 군기지만 규율이 엄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했어요, 진짜.

 그런 건 저희는 어렸으니까 상상도 못했어요

 예. 선배들도 올라오면 무서웠고 대신에 뭐가 좋았냐면, 전통 있는 학교기 때문에 좋은 선수들이 많이 배출이 될 거 아닙니까. 선배들이, 선배들이 틈 날 때마다 올라와서 지도도 해주고 타자도, 투수도 그렇고요. 그게 강팀이더라구요. 예. 그리고 그냥 예를 들어서 방과후에 운동하고 저녁에 운동 마치고 밥먹고 비닐하우스에서 좀 하고 가는 것이 아니고, 12시 될 때까지 뭐 개인적으로 경쟁심을 유발 해 가지고 개인운동을 그렇게… 그러니까 한 사람이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은 다 본단 말 이에요. 그러면 다같이 열심히 한단 말에요. 그래서 팀 전체전력이 올라가고 좋은 성적을 내게 되고 또 밤 늦도록 까지 타이어 두들기고 연습하고 늦으면 학교.. 버스 끊기면은, 끊기면은… 학교근처에서 하숙하고 있는 친구들이나 학교 숙소나 이런데서 자고 또 아침에 새벽에 또 운동하고 그런게, 네…

 다른 이유가 없었네요. 워낙 딴 거 없이 훈련 열심히 했으니…

 훈련. 진짜 훈련량이 많았어요. 왜냐 하면 지금 이제 내가 애들한테 가르치는 입장이 되가지고 얘기할 때 꼭 얘기해주고 싶은 것이, 고 3때, 그 때까지는 아무리 운동 훈련량이 많더라도 다섯, 여섯 시간 한 숨 자고 나면 피로를 못 느껴요. 그럴 나이에요. 왜냐면 숙면을 취해요. 그러니까 밤 늦게까지 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또 할 수가 있는 거에요. 하루종일 운동하면은 공부 안하고 운동해도 그… 피로가 안 쌓여요. 한 숨만 자고 나면 그 다음날 또 운동량을 소화할 수 있게끔 그런 체력이 되는거에요. 그래서 그 때 하지 않으면 대학교 들어와서 부터는 하고 싶어도 못해요. 왜냐면 그 정도 해버리면 다음날 피곤해가지고 피로가 쌓여가지고 역효과가 나고 그래서 아니, 프로 있으면서도 학교 올라가고 후배들 만나면 어린 애들, 초중고 그때까지는, 대학교 한 1년까지는 틈만 나면 돌리고 뛰고 던지고 하라고. 틈만 나면 그때 완전히 익혀 놔야지 나중에 편하다고.

 1학년 때,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승했던 게 대통령기 우승 하납니까 ?

 청룡기 두개 였었어요.

 1학년때요 ? 대통령기하고 청룡기. 그럼 2학년 때는요 ? 2학년 때가 청룡기였던 것 같은데요.

 그래요 ? 아아, 1학년 때가 준우승이다. 1학년 때 준우승, 2학년 때 청룡기하고 황금사자기 우승 아닙니까 ?

   맞습니다.

 황금사자기죠 ? 그 황금사자기가 아주 '빅게임' 이었어요.

 그거 빅게임이죠 ? 좀 있다 얘기 하겠습니다. 3학년 때는 두 번 준우승시고요..

 세 번.

 세번이십니까 ?

 봉황기…. 봉황기… 아…

  청룡기하고 봉황기하고…

 아.. 화랑대기. 부산에서 한 거. 그 당시 서울시에선 무패였고.

 그, 그때는 보통 네 개가 메이저대회 아닙니까 ? 대통령기, 청룡기, 봉황기, 황금사자기.

 그렇죠. 서울대회는요.

 그때 가장 애착이 갔던 대회가 어느 대회였습니까 ?

 봉황대기였어요.

 왜그랬죠 ?

 전국. 예선 없이 전국의 모든 팀이 토너먼트로 올라와 가지고 하는 거니까 '왕중왕'이죠. 의미가 있는 대회죠..

 그때 고등학교 다니면서 제일 라이벌이던 팀은 어떤 팀이었습니까 ?

 그때 라이벌.. 서울에서는 신일고등학교가 야구를 잘 했어요. 신일고등학교가 그때 당시 고3때는, 그때 감독이 김성근씨였어요. 야구를 아주 이기는 게임을 많이 하는… 아주 게임이 아주 힘들었어요. 신일고등학교. 고3때 경북고등학교한테 두 번인가 져 가지고 준우승을 했는데 그 팀은 라이벌로 생각은 안하고, 왜냐 하면 우리보다 전력이 떨어지거든요. 멤버상으로는 사실 질 이유가 없었어요. 멤버상으로는. 그런데, 1학년 때는 박영진 감독이었어요. 지금 KBO 감독관하시는. 그분이 계속 지도를 했으면 계속, 팀에 계속 3년 동안 계셨으면은 3년 동안 팍 쓸어 버렸을 거에요. 근데 그 분이 어, 타의에 의해 가지고 나가시게 되셨어요. 그래서 구본호 감독님이 들어와서… 구본호 감독님을 욕하는 것이 아니고, 싫다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뭐였냐 면은, 그분이 선린상고-고대를 나와서 10년 동안 현장을 떠나있었어요. 현역에서. 개인사업을 하다가 바로 선린상고를 맡은 거에요. 그러니까 야구에 대한 감각도 떨어지고 사실 '펑고'도 하나 제대로 못 치셨어요. 그래서 차라리 고 2때, 고 3때, 고 2때 두번이나 우승 한 거도 멤버가 너무나 좋아 가지고 그래서 한 건데 고 3때도… 그때도 그냥 가만히 앉아만 계셨어도.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우리가 오더를 짜고 우리가 작전을 했어도,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게임을 했어도 충분히 이길수 있는… 지금 그분에 대해서는 좀 그 하지만은, 안계셔서 좀 그렇지만은 그런 상황이었어요. 굉장히 안타까웠어요. 그래, 이제 그것이 어, 나중에는 고 3 그 좋은 멤버들을 어 9월까지… 보통 멤버가 괜찮으면 3학년 초에 2, 3월에 대학이 다 결정이 되야 돼요. 9월까지 대학을 결정을 못한 거에요. 선수들을… 이제 실력이 없어서, 오라는 데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검은' 그런 게 있어요. 주고 받고 그런, 뭐 장학금도 좀 내라고.. 선수들이 너무 그래 가지고 쫓아내버렸어요. 스트라이크 일으켜 가지고. 그래 가지고 마지막대회 황금사자기인가를 아마 감독 없이 했다는, 아마 다른 감독인가 들어갔을 거에요. 제가 병원에 있을 때.

 고등학교 때 박코치님 최대의 라이벌 선수는 ? 고3때로 치죠. 한명 꼽으라면 누구입니까 ? '내가 얘한테만은 지기 싫었다..' 하던 선수?

 그런 애는 없었어요. 건방진 얘기일지는 모르지만. 나 자신, 나는 최고라고 생각을 했고 난 라이벌은 내 주위에는 없다.. 실업 팀, 대학 팀 선배든 그것이 지금도 그렇지만은 주위에, 옆에 라이벌 비슷한 사람이 그 사람보고 아웅 다웅 해봐야 그 그릇 밖에 안 되는 거에요. 저 위를 보고 쫓아가야지, 쫓아가다 보면 그 사람은 못 따라온다고요. 못 쫓아온다고요.. 나를. 나는 어느 정도 올라가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때 당시 건우가 있었는데 그런 '라이벌' 얘기를 많이 해요. 비슷하니까. 근데 전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기자들, 그 당시 기자들 기사거리. 잡지나 신문이나 기사거리를 많이 넣으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참..

 여기 청룡기 우승한 난 다음에 성준선수 인터뷰에 "박노준이한테는 죽어도 지기 싫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있었어요.

 그 친구 아마 그랬을 거에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하여튼, 했다 하면 지니까. 나는 전혀 생각을 안 하는데, 그 친구는 그런 생각을…. 나중에 대학 와서…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대학 와서… 또 스타일이, 그 친구는 공이 빠른 스타일은 아니고.. 나는 빠르게 던졌다고 그러니까 전혀 염두에 안 뒀었죠.

 고등학교때 투수로서 주무기가 '슬라이더' ?

 슬라이더. 빠른 슬라이더. 똑같이 직구에서 오다가  몸쪽으로 요만큼 떨어지는 슬라이던데 직구하고 거의 비슷하니까 그냥 헛스윙이 많은 거에요.

 제일 기억에 남는 경기는 언제에요 ?

 어…  물론 봉황기 결승전 때 다리 부러진 거도 그렇지만, 제일 기쁘고 좋았던 때가 고1때 그 부산상고한테 대통령기 우승할 때… 상대 투수가 윤학길 선밴데, 15:1로 결승전에서 박살을 냈어요. 나 고 1때.

 고 1때는 팀에서 어느 포지션을 ?

 고 1때는 1번타자. 1번타자하면서 피처를 봤는데 그 때 전국대회 첫 대회인데 제일 주목을 많이 해요. 온 국민이 주목을 하는 대회에서 결승전에서 15:1로 깨고 내가 MVP를 받았어요. 고 1이. 그게 굉장히 뉴스 거리가 된 거에요. 그래서 그때부터 이제 좀 튄 거죠. 지금 생각하면 매스컴이 실력 이상으로 좀 많이 해줬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해요. 왜냐면 프로도 없었고, 마땅한 다른 종목에서도 그만큼, 다른 종목을 다루지도 않았고, 매스컴에서.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을 해요.

 고등학교 때,  뭐 중,고등학교 여학생들 팬이 장난이 아니었잖아요. 고교야구 최초의 오빠부대. 거의 그런 분위기. 코치님 고등학교 3학년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다리 그렇게 되시고 한국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병원이 아주 여고생 팬들 때문에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그러던데…

 뭐 그것도 어… 전국대회 고교야구, 프로야구가 없었을 때 결승전인데 그 플레이볼 시간이 저녁 6시에요. 평일이었는지 기억은 못하겠는데 저녁 6시면 거의가 집에 들어와 가지고 밥상 받아 가지고 같이 야구를 보던지.. 그럴 시간이라 가지고 시청률도 높았을 거에요. 관심도 많았고. 그런데 그것도 1회에 그렇게 되면 한 6시, 한 20분에서 30분정도 될 시간에 홈에 들어오다가… 그러고 게임 마치고 또 병실에서 또, 난 기억이 안 나서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이 얘기해 주더라고요. 뉴스, 병실에 와서 생중계를 하고 그래서, 그렇게 해가지고 알려지게 됬어요. 그렇게 해서. 그래 가지고 한국병원앞에 창덕여고가…. 맞죠 ? 있었고, 또 학생들이 아침이고 저녁이고 오다가 들리기도 하고…^^

그 발목 뒤틀린 순간에 생각났던 거 있으세요 ? 아팠던 거는 당연한 거고, 그 외에 무슨..?

 내가 들어올 때가 3-0인가 그랬어요. 들어올 점수가, 제가 들어오는 점수가 지금 나는 3-0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2루에서 뛰어들어오다가… 실질적으로 점수는 나는 모르겠는데, 내가 3-0이라고 기억을 하고 '아, 오늘은 이기겠다' 이런 생각을 했다고. 그 다음에 아파 가지고 들어갔는데 이건 웬만큼 아프면 나는 무조건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한 거에요. 부러지지만 않으면. 아마 한참 안에서 나간다 만다 나간다 만다.. 엎드리고 움직이고 그랬을 거에요. 아마, 그 안에서. 결국은 주저 않고 말았는데… 알죠 ?  어떻게 부러졌는지 ?

     복숭아뼈 2개 나가고, 인대 끊어지고.

 예예.. 근데 3-0이면 그래도 이기겠다.. 그리고 이제 이기고 보자. 이따가.  그러고 갔는데 아, 병원에 가 있는데 아주 갑갑하더라고요. TV로 중계를 하니까.

 김건우선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그 선수 떠 올리면 어떤 생각이…

 참… 초, 중,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닌.. 뭐라고 해야 하나…죽마고우죠, 뭐.  그 친구도 잘 되야 할텐데...


호랑이 소굴

 첫 태극마크는 언제 다신 겁니까 ?

 고1때, 청소년 대표.

 그때 출전했던 대회가 어딥니까 ?

 대만대회인데 이름이 기억을 못해요.

 성인 국가대표 때는 그럼 ?

  대학교 1학년 때. 그때가 82년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할 때에요. 김재박선수 번트대는.

 그때 팀에서 막둥이로?

 주로 교체 멤버로 나와 가지고 1루 봤어요. 그때 투수로 되가지고 호주게임할 때 나가 던지고 중간에 가끔 대타 나가다가 게임이 안 풀리니까 어우홍 감독이.. 제가 이제 왼손잡이니까 살아나가라고. 그래 가지고 저는, 일본 피처가 잘 던지고 있었어요. 홈 플레이트가 이렇게 있는데 맞고 나가려고 진짜, 지고 있었으니까. 맞고 나갈라고 발은 배터박스 안에 놓고 몸은 그 위에 얹혀놨어요. 어, 그런데도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거에요. 바깥쪽은 내가 몸 안 맞잖아요. 야, 이쪽으로 던지면 난 몸에 맞으려고 그러고 있는데, 꼼짝 않고 있었어요. 투스트라이크로 몰렸어. 몰렸는데 이제는 쳐야되니까 가운데로 공이 온거야. 가운데로 왔는데 이렇게 있는데, 눈높이로 오더라구요. 갈 수가 없는 거야. 쳤는데 세컨이 점프하면서 라인드라이브로 잡혔어요. 어우홍 감독은 그때 '아, 이젠 뭐가 되겠다' 싶은 생각을 그때 했대요. 어감독이. 그리고 그 다음 이닝에 뭐 포볼 나가고 김정수 3루타 치고, 한대화 홈런치고 그래서 엎어버렸어요. 고마운 것이, 나보다 좋은 선수도 많았는데 어우홍 감독, 그 연세가 많이 되신 분이 저를 선발 해 줬어요. 김재박, 이해창, 심재원, 최동원, 임호균 이런 뭐 나이 많은 선배들이 있는데도,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같이 멤버로 뛰게 해 줘 가지고….. 그걸로 나는 군대 면제혜택 받고…

 당시 고-연전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

 저보다 1년 위가 선동열인데 3년 동안 아주 무적을 구가했죠. 연대한테는 10번해 가지고 9번 이기고 한번 졌는데, 4학년 때 졌어요. 4학년 때. 내 앞에 선배들 것은 다 이겨주고, 본인 경기는 져버렸어요. 내가 그때 4학년 때 초에 어깨를 다쳐 가지고 그때 세계대회를 한 대회를 빠졌어요. 그리고 여름에 세계대회 안가고 고-연전, (시즌 학교게임도 별로 출전 못하다가) 나갔는데, 안 좋은데도 지금 돌아가신 최남수 감독님이 던져줘야 된다고. "다는 못 던지니까 앞에 다른 피처 내보내고 안되겠다 싶으면 올라가겠다…." 라고 했는데

제가 생각할 때는 아주 외람된 생각이지만 솔직히 박코치님 딱 떠올리면 '고등학교 야구'가 제일 먼저 떠오르고요, 그 다음에 떠오르는 게 사실 최초의 '혹사 케이스' 아닌가 그런 생각도 사실 들어요.

 네… 고등학교,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나는 정규 경기에서 그때는 9이닝 인데 그걸 다 완투를 했어요. 중 1때 쪼그만 놈이 이만한 중 3짜리 상대를 해 가지고 중학교 3학년 3년, 고등학교 3년, 그다음에 대학교 4년인데, 이 대학교 4년이 보통 한 게임만 있으면 봄에서 가을까지 학교 시즌만 던지면 여름에는 쉬어요. 학교 시즌만 던지면 몇 게임 안 돼요. 굉장히 여유가 있는데, 학교 시즌 때는, 학교 게임 때는 서울대랑 해도, 돌아가신 최남수 감독님이 불안한 거에요. 소심증이 있어 가지고 안타 한 개만 맞으면 불안 해 가지고 선동렬이 있는데도. 선동렬 얘는 아프다. 팔꿈치 아프다고 맨날 놀았어요.^^ 그게 지금 일부러 그랬느냐, 진짜 아팠던 거냐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데^^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선동열 선수가 생각은 잘 하셨네요..

 그래서 학교 게임 다 던지고, 한때는 17승 1패까지 했죠.  프로야구도 아니고, 학교 게임 몇 게임 되겠어요 ? 대학야구. 그리고, 비 시즌 때, 비 시즌 때는 대표팀. 대표팀에서도 피처만 하면 좀 쉴 기회가 있죠. 이게 안되죠… 절단 난거죠. 그게 어,  그 때가 84년 LA올림픽 때도 안 던지면 방망이 치고.

 전적이 어땠죠 ? LA 올림픽 때 ?

 4등. 근데, 준결승에서 미국하고 붙은 거야. 미국 팀에는 당시 상대팀 4번타자 마크 맥과이어, 윌 클락이라고 지금 오리올즈, 볼티모어에 있는데. 이범에 연수 갔을 때도 바비 발렌타인이라고 메츠 감독이 잘 아니까… 어? 맨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보다가 어디 아프리카 같은데서 (우리 한국으로 치면) 아프리카 같은데서 사람하나 와 가지고 공부하러 온 놈 이렇게 취급했다가  마크 맥과이어하고 대결한 피쳐, 선수라고 했더니 다 다시 보는 거야. 어 걔들 그런 거 굉장히 또… 아우 그런 건 인정해줘요. 그때 미국은 마크 맥과이어하고 멤버가 좋았는데 일본에 사이드 암 투수한테 말려 가지고 준우승했어요. 멤버가 그렇게 좋았는데… 그래 우리는 미국한테 5-2론가 지고. 아! 어… 그때 다저스에서, 지금 찬호 던지는 스타디움에서 던지는 경험도 해봤고. 그러니까 안 던지면 방망이, 방망이 안치면 던지고… 그러니까 대학 4년 동안 꼬박 그랬어요.

 최남수. 고 최남수 감독님에 대한 기억은 ?

 눈 크고 무섭다는 생각뿐이 없어요. 소리지르고 패대고… 선린상… 선린중학교, 선린상고, 고대…빠따… 빠따 안 맞았으면 더 야구 잘했을지도 몰라요.^^

 고대에서도 그렇게 때렸나요? 근데 '박노준'도 그렇게 때려요?

 하~~ 천하의 선동렬도 빠따 맞는데. 선동렬이하고  나하고는 그래도 조금 나았어요. 왜냐면…

 두분이 동갑이세요?

 선동열은 62년생이예요. 근데 여기는 대외적으로는 63년생 1월 생으로 나오는데 아버님이… 동렬이 부친께서 출생신고를 늦게 했어요. 그래서 생일은 다 62년으로 찾아먹는데요. 난 1학년을, 초등학교를 두번 다녔으니까 62년생. 10월 26일

 동갑이네요? 그럼?

 그래도 운동세계에서는 나이가 어리더라도 학교 들어간 '짬밥순' 으로 하기 때문에… 그래서 3년을 꼬박 같이 했는데…

 선동렬 선수 학교다닐 땐 어땠습니까? 같이 뛰는 팀메이트로서…

 아이  룸메이트까지 했어요. 그래 가지고 둘이 개구쟁이 짓 많이 했는데, 둘이서 대표선수 생활을 하니까 학교에서 오래 있을 시간이 없잖아요.
합숙훈련하고 국제 대회 나가니까. 그래 선배들한테 나가 있는 동안 안 맞을 거 미리 맞고 나가요. 갔다 오면 그동안 안맞은 거 맞고. 맞았어요. 감독님은 둘이는 잘 안때렸죠. 감독은 다른 선수들은 그렇게 패도 우리한테는 손 잘 안댔어요. 우린 대신 선배들한테 많이 맞았죠. 그래 같이 둘이 터지니까 둘이 신세한탄 많이 하고 그럴 수 밖에 없죠.

 선동렬 선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건데 고등학교 2학년 때 황금사자기 그얘기도 잠깐 빼먹었는데 그때 투런 홈런, 쐐기 홈런 치셔 가지고 우승하셨잖아요. 선동렬 선수한테…

 그때 그 게임이 준결승에서 선린상고,  천안북일고등학교. 천안 북일의 이상군이. 민문식이의 세광고등학교. 선동렬이의 광주일고. 이 넷이 붙은 거예요. 근데 다 우승한 경력이 있는 팀들이야. 그래서 준결승에서 말 그대로 '왕중왕'이었죠. 우리는 민문식이의 세광고를 이기고 올라갔고, 저쪽은 이상군이의 북일고를 깨고 올라간 거예요. 그때 북일고 감독이 아마 저 김영덕 감독이고…

 코치는 이희수 코치였잖아요?

  네…코치였죠. 딱 만난 거예요. 왕중왕이죠. 자존심도 걸린 거예요. 한번 붙어보자 그래가지고. 근데 그때 건우가 먼저 나갔나 그래요. 그리고 내가 나중에 나가서 4횐가 5회부터 했는데 그때 방망이… 안타를 3개 치면서 마지막에 홈런, 슬라이더를 받아 쳤는데…아.

 그때 솔직히 얘기해서 선동열 선수 공 칠만 합디까?

  아, 볼 좋았어요.

 고등학교 시절엔 정말 아무도 못쳤잖아요?

 예. 볼 좋았는데… 근데 자존심이 걸렸으니까 이제 이를 악 다물고 덤빈 거죠. 근데 야구가요, 그게 있어요. 처음에 첫 대결이 무지무지 중요해요. 타자하고 투수하고… 이 투수가 별 볼일 없는 투수예요. 타자는 잘치는 타자란 말예요. 첫 대결에서 한게임 잘치잖아요? 그럼 이 투수는 평생 '밥'이예요. 별볼일 없는 투순데 잘치는 타자한테 처음에 이 투수한테 당했다하면 끝내 끝까지 당해요. 다른 선수들 다 이 투수 볼을 잘치는데 이 타자는 못치는 거예요. 이상하게 타이밍도 안맞고 저 투수하고는 그런 게 있어요. 근데 이 투수는 무지무지 잘 던지고 다 못치는데 이 타자는 별볼일 없는 타자란 말예요. 그러니까 어쩌다 첫 타석에서 안타를 쳤어요 바가지를 치던 어떻든 간에 평생 이 투수한테는 자신감을 가지고 붙어 가지고 잘 쳐요. 근데 선동열은 나한테 첫게임에서 박살이 난 거예요. 그래서 학교에 같이 있을 때는 붙을 일이 없고 프로 왔는데 나는 투수를 하다가 방망이를 쳤는데… 선동열 볼은 정말 잡아놓고 쳤죠.

 그래요?

  예. 잡아놓고 쳤어요. 프로에 와서도 한번은 사이클링 히트까지… 2루타 하나 치면 사이클 히튼데 피쳐를 바꿨어요. 김응룡 감독이.  3타수 3안타에 홈런 치고 3루타를 치고 원히트도 치고,  2루타만 치면 사이클 히튼데 김응룡 감독이 피쳐를 바꿨어요. 형편없는 투수로. 그런데 삼진 먹었어요… 하하

 오비시절에요?

 예.

 그럼 코치님 투수시절 할 때 그렇게 천적이 있었어요? 딴사람 다 잡아도 나오기만 하면 맞았던 타자가 있었나?

 지금… 기억으로…. 프로야구 심판하는 임채섭 심판이라고 알거 예요 아마. 그 친구가 우리 동긴데 그 친구가 잘 쳤어요. 기억 나는 선수는 그 친구 하나.


천당에서 지옥으로

 오비 입단 하실 때 투타겸업도 하셨고 그러셨는데 배경은 어떻게 된 겁니까? 본인은 한 분야로 나가고 싶으셨어요? 아니면 본인 의지가 두개 다 한번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그래서 사람 잘 만나야 되고, 그게 또 자기 복이고, 운도 따라야 되고 이런 것이 무시 못할 것이… 만약에 지금 오비나 엘지 어느쪽 응원할 지 모르지만 내가 만약 엘지를 갔더라면… MBC를 들어갔더라면 더 화려하고 좋은 선수 생활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김성근 감독이 투타를 같이 시키자고 결정했다고 신문 보도나온 게 있어요

 그랬는데 결정적으로 투수를 하다가 은퇴를 할 수도 있었는데 중간에 겸업을 하게 된 것이 그때 투수 코치가 신용균씨예요. 감독이 김성근씨고. 오비… 이틀동안에 배재고등학교에서 이틀동안에 500개를 던졌어요. 제 스타일이 원래 피칭할 때 공을 잡은 손 바닥이 보이면서 뒤로 끌어 가지고 와인드 업을 하는 스타일인데, 두분이서 이렇게 뒤집어서 손등을 보이게 끔 해서 와인드 업까지 가게 하자고 고치자고… 참고로 선수들, 투수들 부상당하는 것이 왜냐 하면 힘이 떨어져 가지고 안 쓰던 근육을 쓰면 거기서 부상이 오는 거거든요. 근본적으로 몇 년동안의 피칭폼을 바꾼다고 이틀동안에 500개를 던지며 무리를 시키니 어깨가 성할 수가 없죠. 거기서 갔어요. 어떻게 보면 전 악감정을 가지려면 가질 수도 있지만 스승이니까 그럴 수는 내가 없고  기회가 그렇게 되서 방망이로 완전히 치게 된거죠.

 그렇다면 지금 10년 전으로만 돌아가서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 투수예요. 야구는 투수놀음이예요.

 그래요?

 예. 타자는, 신문도 보고 그래서 알지만은 야구가, 투수가 공을 던져야 게임이 시작되는 거예요. 스포트라이트 받고, 투수가 재밌어요. 타자들 요리하는 게… 치는 것도 호타고 잘치는 그런 맛도 있지만은…

 고등학교 때 치시던거 생각하면요 타격 역시 '예술의 경지' 였잖아요?

 아… 근데 내가 차라리 빨리 대학 때던지 프로에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처음부터 방망이 쳤으면 기록하나쯤은 남기고 그만 뒀을 거예요. 그것만은 자신 있었고, 그 다음에 1번말고  클린업 3,4,5번에 배치되는 거에 따라서 영향을 많이 받아요.

 타순은 어디가 제일 적성에 맞으십니까?

 난 3,4,5번이죠. 그랬으면 난 참 기록하나 남겼지 싶어요. 근데 팀에서는 1번을 요했기 때문에,  1번은 왜냐면은 완볼, 투볼, 완투, 완쓰리, 왠만한 거는 봐야 되요. 배팅 찬스면 일단 쳐야지 홈런을 치던 안타를 치던 많이 칠 거 아녜요. 근데 1번 타자는 우선 살아나가야 되니까 참아야 된다고요. 그러면은 카운트 몰리게 되고 볼 들어왔으면 살아봐야 포볼이고 카운트 몰리면 제 스윙 못하고 그래서 프로 와서 1번을 많이 쳤기 때문에… 많이 쳤기 때문에… 물론 이종범 같이 특출한 경우도 있어요. 난 그만큼 야구를 못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은 만약에 타순만 그렇게 조정이 됐다면은 나도 한가지 기록을 남기지 않았나 싶어요.

 '박노준' 으로서 이적을 두번이나 경험 하셨는데 두번의 트레이드 중에 어느것이 더 충격적이었다거나 아니면… ?

 해태 갈 때는 무지무지 좋았어요.

 그랬던 거 같아요 당시 인터뷰에서도 강팀으로 가게 되서 아주 좋다고…

 선린상고, 고대 있으면서 잘하는 팀에서, 나은 선수들 중에서 튀면은 이거는 올라 선거예요. 근데 고만고만한 선수들 중에서 거기서 튀어 봐야 그릇이 그거 밖에 안되요. 맨날 꼴등 할 테니까, 재미도 없고… 근데 해태 가면서… 결국은 김응룡 감독님이 저를 그렇게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맨 처음에는 그 뒷얘기가… 뒷얘기를 트레이드 된 과정에서 들었는데 오비에서는 서울 토박이고 서울 간판이니까 내주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오비는 그때 굉장히 '투수 난' 이었었어요. 윤동균 감독이 되면서 해태에서 놀고있는 이광우 달라고 그랬더니 김응룡씨가 그럼 노준이 달라고. 그러니까 이쪽에선 갑갑하죠. 오비측에서도… 근데 김응룡 감독은 생각을 안 했대요. 그냥 찍었는데, 왜 찍었느냐?  해태랑만 하면은 피쳐할 때도 그렇고 방망이 칠 때도 그렇고 그때까지는 계속 잘 쳤으니까 해태랑 할 때는… 그러니까 김응룡 감독이 왼손이 필요하고 자기네… 찍었는데… 오비에는 나보다 성적도 좋고 더 좋은 왼손 타자… 김광림 선수도 있고 김형석 선수도 있고 하니까 얼른 좋다고 받은 거죠. 그리고 오비에선 안 될 것도 없는 것이 외야가 좋았고, 외야가 제가 나가도 매꿀 수 있는 외야 요원이 충분했고 그래서 한거죠. 저도 좋았고. 갔는데 해태 가 가지고 김응룡 감독 생각보다 못하니까 그런 것도 있었고. 그리고 내가 안 좋은게, 선수가 좋지 않았던, 좋은 선수가 아니었다는 것이 선수 부상 당하는 선수는 절대 좋은 선수가 아니 예요. 부상 안 당하고 계속 126경기 출장할 수 있게끔 몸관리 잘하는 선수가 최고예요. 근데 그것도 열심히 하다가 부상 당하는 것도 있지만 부상 안 당하고 요령껏 하고…

 부상 참 많이 당하셨어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몸이 딱딱해요. 몸이 딱딱하고 펜스 플레이 때 순간적으로 자제하고 이런 게… 근성도 좀 문제가 있었죠. 부딪치던 말던 깨지던 말던 저건 잡아야 겠다고 그러면은 생각 않고 쫓아가는 것도 좀 있었고. 오비 있을 때부터 맨날 부러지고 깨지고 했거든요 그게 요령 부족이예요. 그게 기억에 남는 것만 부러진 것이, 부러진 것이 4군덴데 4시즌 벌써 망친 거 아녜요. 거 인대 끊어지고…

 제가 적어 왔는데요.  87년도 오비시절 어깨, 88년도 손등뼈, 89년도 손가락 골절, 92년도 왼족 무릎, 93년도 갈비뼈, 94년도 허벅지 근육, 그래도 이때 골든 글러브 타셨어요.  96년도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대충 맞지요?

 맞아요. 근데 좋은 선수는… 평생 선수생활 하면서 항상 부러지는 건 굉장히 중상이거든요. 야구선수한테는, 시즌을 망치는 거니까, 그거 두세번만 해도 연봉이 벌써 얼마나 올라가고 내려가고 차이가 나는데 그러니까 나는 좋은 선수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제 후배들한테 얘기 할 때 절대 부상 당하지 않고 부상 방지 할 수 있는 슬라이딩 방법이라던지 다이빙 캐치라던지 베이스 들어갈 때 슬라이딩 이라던지 팬스 플레이할 때… 모든걸 갖다가 코치가 그런걸 애초에 캠프 때부터 제대로 해줬으면 선수들 부상 안 당해서 좋고 팀도 좋고, 구단도 좋고, 팬들도 좋고…  에, 그런 거를 체계적으로 못했던 것이 굉장히 안타까워요.

 그러고 보니까 참 정말 야구인생 자체가 처음 봉황대기 결승전에서부터 무슨 '부상 악령' 내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이 부러지셨네요.

 그렇게 부러지고도 데리고 있던 팀의 지도자들이 안 잘라버리고 놔둔 것이 행운이었지 않나 싶어요.

 쌍방울 시절엔 분위기가 정말 어땠습니까?  정말 그렇게 암울한 환경 속에서 뛰셨나요?

 네… 맞습니다.  보도 된 바와 같이. 진짜 그렇고. 지금 통신업체가 물밑작업을 하고있는데 될 거 같아요. 그럼 나아지겠죠

 돌이켜 보시면 프로에서의 박노준하고 선린상고의 박노준. 고대까지… 비교하시면 어떠세요?  제가 솔직한 말씀을 드리면 제가 볼 때 박코치님 본인이 본다 해도 프로생활은 흡족하지 않으실 거 같아요. 실망스러우실 거 같아요.

 아, 물론이죠. 그래서 지도자로 한번… 지도자로 한번 제대로 인정 받고, 또 그러려고 가서 열심히 2년 공부하고 왔는데 이제는 코치로도 오라는 데가 없어요.


지도자 박노준

 저.. 토론토에 1년 갔다 오시고 그 다음에 뉴욕 메츠 갔다 오셨죠. 뉴욕 메츠에선 어떤 일 하셨어요?

 마이너리그 코치예요. 싱글A 코치. 주루 작전 코치.

 세인트 루신가 거긴가요 싱글A 면…

 세인트 캐터링. 그게 토론토 밑에 토론토 40분거리. 캐나다 나이아가라 폴스 옆에.

 혼자 가셨어요.

 혼자 갔습니다. 와이프는 왔다 갔다 하고. 애들은 방학 때 오고.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그래요 올해는… 처음에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콜럼비아에 캐피탈 시티에서 있었고.

 거기서도 주루코치 하신 건가요?

 예. 작전 코치, 타격 코치. 두가지. 그다음에 뉴욕에.

 메이저 리그 걔네들은 어떻게 다르던가요? 직접 부딪쳐 보시니까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 뭔던가요?

 마이너 리그에서는 애들을 가르키는 교육과정이예요. 루키, 싱글A, 더블A, 트리플A .싱글A도 3단계가 있어요. 상중하. 1년씩 단계를 밟아가면서 올라가는 건데 공 잡는 거부터 던지는 거부터 사인 플레이  그 다음에 투수 같은 경우는 1년에 하나씩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단계를 밟아가며 올라가면서 기초를 단단하게 해가지고 날마다 게임을 통해가지고 기량을 향상시키고 그래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이 메이저 리그 선수거든요. 야구를 논하려고 하면 마이너리그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논할 것이 아니라 메이저 리그하고 한국야구하고 이렇게 놓고 얘기를 해야 되요. 거의 바둑으로 치면 8-9단, 야구를 치면 메이저리그는 거의 경지에 다다른 선수들이예요. 거의 뭐 야구에 관해서는 거의… 왜냐 하면 완벽하면 승부가 날수 없는 게임이거든요. 그런데 어느 팀이 기본기도 그렇고 실력을 갖추고 있어서 에러를 안 하느냐 홈런 맞을 때 투수가 실투를 안 하느냐 타자가 실투를 안 놓치고 쳐내느냐… 이런 거에 따라가지고 승패가 갈리는데 메이저리그라서 에러를 안하는 것이 아니예요. 하되 그 비율이 퍼센티지가 떨어진다는 거죠. 한국이 열번 할거 메이저리그는 한두번 한다는거죠.

 결국은 그 기본기 차이가 엄청나죠.

 그거예요. 그게 마이너 리그에서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기본기를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러면서 120년 역사니까 하다 보면 이렇게 가르치면 안되겠고 저렇게 가르치면 되겠고… 요런 게 나올거 아녜요? 그러면서 그런걸 갖다가 안 좋은거는 버리고 좋은 건 도입을 해서 계속 주입시키고… 계속 그날 게임 할 때 실수 나온거 그  다음날 반복해서 오전에 연습 시키고 오후에 게임하고… 그런 것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고 기다려주는, 투자해 가지고 기다려주는 시스템도 부럽고, 다른 것 보다도 시설. 그라운드, 운동장 필드하고 선수들이 웨이트 트레이닝 이런걸 꾸준히 해 가지고 부상 방지 하고 파워 기르고… 이런 시설들이 너무나 잘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해 가지고 팀을 운영을해서  싱글A면 싱글A, 더블A면 더블A끼리 급을 맞춰서 리그를 결성해서 게임을 하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평택이나 오산 이런데 소도시에다가 야구장을 지어 놓아가지고 가족적인 분위기로 멋지게 지어 놓아가지고 게임을 해요. 홈앤드 어웨이로 게임을 해요. 보통 입장료가 5-10달러인데 와서 하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선수들이 열심히 하고 또 미국 사람들 워낙들 야구를 좋아하니까, TV에서 메이저리그하다가 걔들 딱 보면 재미없죠. 그런데도 열심히 하는 거… 그런거, 하려는 자세 그런 거 보고 또 와서 감동하고 그렇게 살더라고요.

 박코치님이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럼 마이너리그라도 진출 하셨으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네요.

 내가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라고 하면 무조건 가요.

 무조건?

 예.

 요즘 그러면 우리나라 고등학생들 미국 진출 하는 거 나쁘단 생각 안합니까?

 절대 안 해요. 절대 나쁜 거 아녜요.

 그럼 우리나라 야구는 어떻게 됩니까?

 그럼 우리나라 야구는 어떻게 되는냐 이 문제가 나오는데 사실 아~ 이것을 야구를 놓고 얘기하기 전에, 우리나라 선수들한테 8개 구단이 제대로 대접을 해주고 있느냐가 먼저죠.  절대 아니거든요.

 유학 자비로 가신 거죠?

 예. 그래요. 100억. 1년에 구단이 100억 적자라고 쳐요. 근데 그 광고 효과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광고를 하고있어요. 모그룹 광고를 하는데 야구단 가지고있는 것이… 그런데도 저렇게 죽는 소리 하는데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선수라도 부상 안 당하게끔 트레이너를 공부시켜서 데려와서 하던지 시설을 제대로 해놓던지 그다음에… 우리 선수들 너무너무 적게 받고있거든요. 거 지금 조금 안좋다고 계약금 2-3억씩 받고 들어오면 2-3년 하다가 안되면 버리잖아요 또… 또 다른 선수 새로 뽑으면 되지 이럴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제대로 키우려고 생각을 하고 코치부터 공부를 시켜가지고 와서 선수들을 제대로 키우기만 하면은 충분히 우리나라 야구가 아직까지 자원이 있어요. 충분해요 예.저쪽에 남미 애들 10명 메이저 리그에 데리고 1-2 명 올라가면 남미에선 10명 잡아와서 1-2명 메이저 올라가면 성공이라고 해요.  우리는 지금 총 17명 나와 가지고 3명 메이저 리그까지 올라간 거예요. 얼마나 잘하는 거예요. 굉장히 실력이 있다구요. 우선 그렇게 선진야구를 배워 가지고 거기서 메이저 리그 못 올라가면 다시 들어와 가지고 팀에 들어올 수 있게끔 제도적 장치도 좀 하고 그다음에 들어오면 5년 동안 프로야구에 못 들어오게 하는 것도 깨야지, 사실 그 선수들이 와서 미국야구, 선진야구 배운거 같이 접목시켜서 수준도 같이 올라가고, 이렇게 같이, 그러면 같이 사는 거 거든요. 그런데 나가면 못 들어오게 해놓고 가는 거 돈 많이 받고 가니까 돈 싸움이 안되니까 여기서는… 수수방관 하고 이럴 것이 아니거든요.

 프로생활 하시면서 제일 잘치는 타자라고 생각한 선수가 누굽니까? 본인 말고…
12년간 프로에 뛰실 때 '이 선수는 정말 최고의 타자다.' 라고 느낀 선수?

 제가 전에 선배들 이후에 선수들 한번 뽑아 봤을 때  김기태, 이종범, 장효조 이 세명 정도.?

 그래요? 타고난 타잡니까? 김기태 선수 근데 왜 삼성 가서 기대이하로 성적을 냈대는데 대충 그 이유가 상상이 가세요?

 사실 올해, 올해 첫해지만 나가있었기 때문에 하는 거 잘못 봤는데 글쎄 그…

 그렇게 끝날 선수 아니다?

 아이 그럼요…

 그렇게 세 선수가 정말 때리긴 정말 잘 때립니까?

 근데 아마 모르긴 해도 김기태 선수가 술을 좀 줄이면 더 잘하지 않을까… 좋은 성적도 내고…

 박코치님은 술, 담배 그런 거… 담배도 안하십니까?

 전 안펴요. 여러분 담배 피면 담배 피우세요.

 투수는? 선동렬 선수는 인정해야 할거고. 타자로서 상대해 본 선수 중에 정말 저 선수는 '국보감'이다.

 글쎄 선동렬 선수 외에는…

 예전엔 박코치님 보면 야구천재라는 소릴 참 많이 들으셨는데 그 천재성. 선천적인 거 하고 후천적인 노력. 그 비율이 어느 정도 되어야지 정말 수퍼스타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세요?

 갑자기 대답하기 어려운 걸…

 근데 분명히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런 게 있는 사람들은 야구하는 게 좀 쉬울 거 아닙니까?

 알다시피 야구 머리 많이 쓰는 운동이잖아요. 기술적으로도 그렇고 이해를 빨리빨리 하고 느껴야 되거든요

 박코치님은 참 머리 잘 쓰면서 야구하시던 분으로 평가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야구인들이 볼 때 야구 잘한다 못한다 할 때는 던지고 치고 받고 이것보다도 좀 전에 야수 같은 경우는 던지고 치고 하는걸 수시로 보지만은, 주루 플레이 할 때 그때 많이 봐요. 야구를 알고 저 친구가 주루 플레이를 하나, 야구를 알고 게임을 하나 어떤걸 보냐면… 예를 들어, 1:1이예요. 노아웃에 2루에요. 안타 하나면 게임 끝날 수도 있어요. 아웃 코너 볼 가는 것도 2루 쪽으로 그라운드 볼 보내서 2루 주자를 3루로 보내고 그 다음에 스퀴즈를 하던 외야플라이를 치던 한점 들어오게 해서 게임을 끝내게 하는, 그때 노아웃 2루 있을 때 그때 야구를 어떻게 하는가? 야구인은 그런 거를 기준으로 보거든요


박노준의 Y2K

  지금 프로를 뛰고 있는 선수들… 뭐 2년 동안 못 보셨지만 정말 대성할 수 있는 선수가 있나요? 참,  이승엽 선수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친구는 아마 제가 모르긴 해도 나름대로 무척이나 노력했을 거예요. 그래 가지고… 어. 54호 홈런을 칠 수 있는 폼이 그… 골프도 그렇고, 골프가 머신, 기계가 되지 않으면은 성적을 못 내는 거거든요. 어느 정도 거리가 되면은 딱 그만큼의 힘을 써야 되는데 그게 완전히 몸에 베어있지 않는 이상 그걸 못해요. 그렇듯이 야구도 마찬가지예요. 스윙머신 같이 순간적으로 어느 정도 코스에 공이 왔다 하면 어느 각도로 나가야지 홈런이 되고… 이게 나오거든요. 근데 이게 야구가 달라지게 되요. 타이밍을 안 맞춰줘야 되요. 타이밍을 뺏으려고 체인지업을 던지고 변화구 던지면 타자는 그 타이밍을 잡아가지고 쳐야 되니까 무지하게 노력을 했을 거예요. 이승엽 선수는 그게 되어있어요. 이승엽 선수는… 이제 이승엽 선수 사생활 관리 잘하고 계속해서 연습.. 힘 기르는데 주력을 하고… 그쪽으로만 힘을쓰고 전력을 해야지 다른데 눈 돌리면 오래 못하죠. 그러니까 지금 현재 있는 폼을 계속 흐트러지지 않게끔 한군데라도 무너지지 않게끔 노력을 해야 된다는거예요.  아까 참, 그 어떻게 해야지 천재 되는 거… 그걸 대답을 안 했잖아요? 그건 노력이예요.  기본적인 머리는 있어야 되겠고, 이것만 있으면은 어떻게 하는지 요령 터득하고 거기에 이제 노력을 하는 거지요. 폼이나, 스윙, 스윙 나가는 각도… 아, 이건 굉장히 기술적으로 중요한 얘긴데 장훈씨가 얘기했어요. 그분이 얘기한건 난 다 믿고 싶어요. 왜냐 하면 그분이 그 고생을 해 가지고 이룬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흘려버릴 얘기가 없거든요. 야구공이 135Km 이상 날아오는 것을 이것을 변화구다. 직구다. 몸쪽이다. 바깥쪽이다. 이거를 알고 받춰놓고 칠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거를 0.21 - 0.41초 사이에 이것이 변화구다 직구다 몸쪽이다 바깥쪽이다 파악을 해서 쳐야 하는데 파악을 해 가지고 스타트를 나가는…이거는 인간이 못 한다는거죠. 150 - 160Km 더 말도 안 되는 얘기고. 그거를 어떻게 쳐야 되는가 무한한 연습, 반복 연습을 해 가지고 공이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왔다. 바깥쪽이다. 그러면 딱 왔다고 벌써 뇌로 지령이 떨어지면 바로 그 쪽 방향으로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나가야 되는데 나갈 때 이렇게 제대로 파워 있게 나가는 연습을 했느냐 안 했느냐 충분히 마스터를 했느냐 안했느냐 거기서 치고 못치고 차이가 나는 거죠. 그러면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밥만 먹으며 연습만 했느냐? 그건 아니 예요. 걔들은 개인훈련이란게 없어요. 그런데 걔들은 어렸을때부터 밥만먹으면 게임해요. 밥만 먹으면 시합을 해가지고 게임을 하면서… 150 - 160Km 보면서 날마다 오늘은 쳤다. 어떻게 해서 쳤는가를 느끼는거예요.

 게임을 통해서 터득을 하는군요.

 그렇죠. 연습 열번 하는 것보다 게임 한게임 하는 것이 선수들에게 느끼는 건 더 많아요. 이거를 게임을 하면서  네번치는 거 그거만 치는 것이 아니고 게임전에 연습하고, 그다음에 게임한날 아침에 스페셜 연습 해가지고 자기가 하고싶은 사람들 나와서 미리 코치가 연습을 시켜줘요. 도와줘요. 그러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 하고 들어가면서 이렇게… 그거를 어렸을 때부터 완전히 몸에 체득이 됐기 때문에 지금 150-160Km 빵빵 칠수있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그게 아니예요. 연습을 많이 하지않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이거 잘못된 거예요. 이제 내가 이번 12월 6일날 7일날 무료 야구 교실 나가면 얘기를 해줄 것이 음.. 게임을 많이 해라. 그럼 투수들이 무리는 가겠지만 투수부터 연습피칭 하느니 차라리 게임 던져가지고 느끼고, 맞고, 얻어 터지고, 감 잡아보고, 스윙 삼진아웃 잡아보고 그게 더 기량 향상 시키는데 그 이상 좋은 게 없다는 거죠.

 야구하시면서 제일 후회 스러웠을 때 있었습니까? 야구 총 한 20년 하셨어요?

 24년.

 제일 후회스러웠을 때…?

 부상 당하고 좀 한가할 때… 심적으로 좀 그럴 때가 좀 어려운 게 아닌가 하고 느꼈고…

 이제 지도자 연수 갔다 오셨는데 막말로 프로팀에서 제의가 없고 그러시면 계획은 어떠세요?

 그걸… 이런… 야구계를 잘 모르는 분들한테 얘기를 하기가 좀 그런데 이게 실력만 있다고 들어가는 게 아니더라고요.

 물론이죠. 야구뿐 아니죠.

 어, 다른건… 재작년 은퇴하기 전까지는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오면서 사회가… 완전한 사회인이 되는건데 이것이 학연, 지연, 개인적인 인연, 어떻게 보면 좀 지저분한거 같기도 하고 좀 실망도 되고 이게 실력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또 내가 성격이 모나거나 막 좀 현역 때 그랬으면은, 내가 아 내 업이려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내가 그렇게 모나게 한적도 없는 것 같은데… 예.

 사실은 박코치님 근래에 처음 뵌게 근래에 지난번에 시드니 올림픽 예선전 잠실에서 했을 때 대만전에서 1루측 지정석에 앉아서 구경을 하는데 이렇게 하얀색 옷입고… 구경을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사실 후추는 명예의 전당 야구인 기사를 쓰면 박코치님을 해야겠다고 하고 과거 자료들을 이미 다 모아 놨었거든요. 그때 말씀 드릴까 하고 마음 먹고있는데 금방 나가시더라고요.

 아, 난 그 밑에 1루특 락카룸에 생중계 하는 거를… 야구협회에서 부탁을 해 가지고 비디오를 떠가지고 복사를 한다고.. 본부석에서 받아 가지고 워키토키로 얘기를 해주면은 위에서, 본부석에서  기록 써가지고 벤치로 내려보내는 거예요.

 해설자 쪽으로는 관심 없으세요?

 이번달 20일. 그때쯤이면 알게 될 거예요. 내가 나중에 현장 들어간 다음에 한가할 때 하려고 했는데 조금 빨라지게 됐어요. 두군데 구단에서 코치 제의가 있었는데, 안 맞는 게 좀 있었고 그래서 현장으로 들어가느냐 해설을 하느냐 이런 생각을 하다가 1년 정도는 해설 하는 것도 괜찮다고 주위분들이 그래 가지고…

 너무 축하드릴일이네요.

 이건 작년부터 하자고 했었는데 부탁을 했었는데 내가 2년은 공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발음도 정확하시고 목소리도 잔잔하시고 사투리도 안 쓰시고…잘 하실 거 같아요.
 본인이 생각하실 때 우리나라도 6-70년대 그 고등학교 야구 붐이 열기가 다시 일어나야 되다고 생각하세요?

 일본은 지금 그게 계속 유지가 되고있거든요. 계속 되고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바닥부터 올라와야 되는데 프로출신 지도자들이 아마가서 야구를 좀 활성화 시켜 가지고 좀 같이 올라와야 되는데 잘 안되고 있어요.

 고등학교 야구 지도자로 해 보실 생각 있으세요?

 나중에 나이가 좀 더 들고 나서요… 대신 야구 클리닉은 시간 날 때마다 당장이라도 해야죠.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애들은 기본기 "니네가 이건 꼭 알고 평생 써 먹을 건데 이게 되야지 부상 안 당하고 오랫동안 할 수 있다고 " 그건 꼭 해 주고싶어요. 그거는 그거고 프로 와 가지고 프로 선수들이 플레이 해야 될 것들이 있잖아요. 그걸 이번에 많이 가지고 왔어요. 그런 부분들… 그걸로 게임에 활용할 전술이라던지 기술이라던지 그런게 있어요. 그런거 협조가 안되게 되더라도 그것만하더라도 한단계 올라가게 되니까 프로선수들 전수시키고… 그리고 나머지 클리닉은 제가 자비로 무료 야구 교실이니까요. 근데 이건 시간 나는 대로 자주 클리닉을 해 가지고 잡아주고 그러려고 그래요. 고등학교, 대학교는 다른 사람들 통해가지고 제의가 들어 오더라고요. 내가 그럴 순 없고, 가서 시간 날 때 봐주긴 하겠다고…

 따님 중에 큰 따님이 야구선수와 결혼하겠다면 시키시겠어요?

 저는 존중해요. 야구선수가 아니라도 배구선수라도 그때 가면 말릴 그건 아닙니다.  

 오늘 너무 오랜 시간동안 얘기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충분히 된 거예요?  이렇게 좋은 취지로 글 쓰시는 걸 알았다면, 제 옛날 사진이나 경기 테이프 같은 거 드리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데… 지금은 집을 공사 하는 중이라 전부 다 어디 구석에 보관 중이라, 12월 말 쯤이면 가능할텐데… 그때 필요하면 연락 하세요.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너무 감사 드리고요.  앞으로 해설가로도 좋은 모습 보여 주세요.

 자.. 그럼 또 봅시다.


EPILOGUE

'후추' 독자 중에서 박노준의 '선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본다.  그들에겐 이병규, 이승엽, 이종범…과 같은 이름들은 분명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 역시 '과거 집착증'에 걸린 중환자 취급 받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러나, 막연하게나마 그저 왠지 좋은 세상이 될 것만 같은 '뉴 밀레니엄'을 코 앞에 두고, 오늘의 슈퍼스타가 배출되기까지의 과정을 한번쯤 되짚어 보기에 참으로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배 고프고 코 흘리던 시절, '스포츠' 라는 단어는 오히려 '사치' 라고 까지 느껴지던 그런 시절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스포츠'는 곧 '삶의 질'을 향상 시켜줄 수 있는 인생의 활력소처럼 느끼게 해 준 70-80년 대 '고교 야구'… 그리고 그런 찬란했던 우리 학생 야구의 '마지막 봉우리' 박노준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면서 정식으로 감사의 표시를 전하는 일만큼 '후추'에게 중요한 일은 없었다.   봉황대기 결승전이 열렸던 81년 8월로부터 정확히 18년이 조금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박노준에게 위로와 격려의 한 마디, 그리고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게 된다.  우리 야구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해 준 고교 야구의 '마지막 불꽃' 역할을 수행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기쁨과 감동을 준 것에 대해서 말이다.  

박노준이 못 다한 '야구 인생의 반쪽'은 잊기로 했다.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는 좀 더 밝은 '반쪽'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저 '선린상고의 18번'을 입고 질풍같이 치고 던지고 달리던 고등학생 박노준의 모습만을 간직하고 싶다.  우리 모두가 그런 그를 '영웅' 이라고 부르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혹사', '부상', '은퇴'… 이런 말들은 잠시 접어두고 싶다. 누구 말대로 칭찬만 하고 살기에도, 아니 아름다운 기억만을 회상하고 살기에도 너무나 짧은 인생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같이 수 많은 '스포츠 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우리가 그냥 조용히 떠나 보낸 영웅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박노준도 예외는 아니었다.  참으로 멋있는 이름으로, 멋있는 플레이를 하며, 멋있는 시절을 장식 해 주었던 박노준을 '후추 명예의 전당'에 초대한다.  개인의 명예 보다는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 젊은 시절을 희생 해 준 '슬프도록 아름다왔던' 그 시절의 박노준을 '명예의 전당'에 초대한다...


주방장 명전 Memory 2000.9.3

박노준... 그를 인터뷰하러 갔던 목동의 아파트 촌.  꽤나 추운 날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를 길가에서 기다리며초조한 심정을 억누룰 수 없었다.  박노준의 정결하고 빠른 발걸음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박노준의 마지막 모습은 그 유명했던 81년 봉황기 결승전에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왼쪽 발목이 완전히 뒤틀리며 홈으로 슬라이딩하던 그 사진 한장의 기억이 아마도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내겐 박노준이란 없었다.  대학과 프로 팀에서 활약을 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적어도 내 기억 속엔 그 슬라이딩과 함께 박노준의 존재 역시 아득한 옛날로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런 그를 실제로 만나는 순간 예전의 모습과 크게 달리진 게 없다는 사실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 어떤 명전 헌액자와의 인터뷰보다도 박노준과의 대화는 옛날 생각이 많이 나게 했다.  그의 얘기 하나 하나가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를 돌리는 것과도 같이 그 시절이 아련하게 기억났다.  박노준은 어떤 운동 선수들 보다도 말 솜씨가 깨끗 (?) 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리있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명전 인터뷰 후로 박찬호의 MLB 경기 해설을 하는 그를 보며 방송보다는 일상에서의 말 솜씨가 더 매력있다는 생각을 했다.  방송에서는 왠지 편하게 들리지 않았다. 

 겨울방학 기간 동안 그가 실시했던 야구 교실을 가 봤더니 20명 정도 되는 학생들 앞에서 열심히 가르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만약 아들놈이 있었다면 타격 하나만큼은 박노준에게 배우게 할텐데..' 하고 말이다.   

예전의 선린상고 야구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그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리라 믿는다. 

 박노준은 우리가 어렸을 때 그 어떤 아마츄어 스타보다도 큰 파문을 몰고 온 주인공이다.  무슨 스캔들에 연류되어서가 아니라 그의 스타일이 참으로 독특했기 때문이다.   스릴과 낭만이 넘쳤던 고교야구가 우리 일상 깊숙이 자리잡았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명전을 엮어나가며 어릴적 나의 영웅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흔치 않았다.  하지만, 박노준이야 말로 명전을 통해 처음으로 만났던 나의 영웅이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오히려 서글픈 생각도 들게 했던 만남이었다.  언제 세월이 이렇게 흘러버렸나... 하는 생각에 말이다.

 

 
Posted by 기억상실 :